100L 쓰레기 후회보다 무거운 모래알 성장
새 해가 시작되는 날 처음 들은 노래가 그 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미신이 있다. 난 그 미신을 애써 믿는다고 나를 속이며 에픽하이(Epik High)의 "막을 올리며"를 꾸준히 들어왔다. 타블로가 일련의 사건과 역경을 겪은 뒤 8집을 통해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다는 선포를 하기 위해 발매한 곡이다. "죽을 고생도 즐기면 다 여행. 지옥에서 보낸 한 철 but I only got a tan. I'm good."과 같은 가사는 내가 이전에 보낸 힘든 시기를 다시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미쓰라 진의 "우리가 시체인 줄 알고 밟아댄 새끼들 다 Fuck you."와 같은 가사도 내게 힘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작했던 내 2025년은 어땠을까.
참 별의 별일이 많았다.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입사했던 인테리어 회사는 갖춰진 체계에 비해 업무량은 과도했으며 참석해야 할 술자리도 너무 많았다. 그렇게 몸과 정신이 망가져갔고 그렇게 또 한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그렇게 그 길로 난생처음 정신 병원에 들어갔다. 거기선 정말 일상적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인간 군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내 옆 방에 있던 조현병 환자는 마치 사탄에 빙의한 희생양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간호사들을 저주하더니 금세 목소리를 낮춘 채 무어라 중얼거렸고 그 뒤엔 울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가 하면 같이 방을 썼던 사람 중 한 명은 숨 쉬듯 욕과 입에 담기 힘든 표현들을 내뱉었다. 그 외에도 과거에 갇혀 망가진 현실은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 스스로 성인물을 찍다 가족에 의해 입원하게 된 사람 등 좋지 못한 인간 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혹여나도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일까 봐 무서웠다. 누구도 그런 얘길 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랬다. 아마 가족 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상황을 말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건방졌다.
그렇게 퇴원한 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오래 버티는 걸 목표로 삼자는 마음으로 제조업 회사에 입사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더러워도 닦아내고, 기분 나빠도 최대한 참고 버티자 라는 게 당시의 내 마음이었다. 그렇게 거래처에 미지급금을 미루는 것부터 정당하지 않을지언정 무슨 일을 시켜도 최대한 해내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았고 그렇게라도 인정받으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승진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월급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게 "괜찮지?"라는 말을 건네며 마치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내가 충성도가 높은 줄 알았나 보다. 그러다 내가 다른 직원들에게 조금씩 캐기 시작하니 회사는 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봉사활동 하러 출근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퇴사하고 나서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임금 체불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한 해의 끝이 다가왔다. 그래서 한 해를 쭉 돌아봤더니 너무 허무했다. 내 1년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어떻게 뿌듯하고 이뤄냈다고 싶었던 순간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걸까. 결국 올해도 무의미한 시기를 보낸 걸까. 너무 화가 났다. 회사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분노의 요점이었지만 진짜는 내가 겨우 이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까봐 더 화가 난 것 같다. 회사는 둘째치고 결국 여전히 상황이 어려워지니 도망쳤지 않은가. 도망치기 전에 도피처라도 꾸며놨으면 더 나은 상황이 될 수 있었지 않은가. 정말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정말 한 치의 오점도 없이 떳떳했는가. 칼 끝이 나를 향해야 하는데, 그걸 두려워하는 나의 현실과 무력함이 분노로 변했다. 남들에겐 폭죽도 터뜨리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 연말이 내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어선 안 됐다.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뒤지고 뒤지고 또 뒤졌다. 일단 먼저 적어도 일로서는 인정받지 못한 적은 없었다. 책임감이 있다는 말까지는 못 하겠지만 결과물을 가져가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물에 장식품을 달 수 있으면 더욱 좋았다. 이 결과물을 받아들일 사람이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고 그 부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사람을 상대하는 스킬은 더욱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변했다. 이제는 상대가 고객이 되었든 거래처가 되었든 그 사람과 공적인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다툴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고 자신할 수 있어졌다. 그들에게 공감하는 법도, 내 무리한 요구를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법도, 서로 불편한 시기에 이 상황을 다루는 법도 꽤 능숙해졌다. 이건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 찾은 건 이 정도다. 어떤 부분에 있어선 사소할 수 있지만 내겐 소중한 수확이다.
2026년이 시작되었다. 매번 새로운 막을 올리려 노력했지만 성공한 적이 없는 듯했다. 그 이유는 뒤를 돌아보며 후회만을 아꼈기 때문인 듯하다. 사실 그것을 떨쳐냈어야 새로운 막을 열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그것에 갇혀 그것만을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마치 절대 반지와 골룸의 관계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올해는 달라야 된다고 생각했다. 더 작을지언정 더 품에 안았어야 할 건 성장과 수확이었다. 모래알 같은 뿌듯함들이 더럽게 굳어버린 지방 같은 후회보단 훨씬 무거워야 했다.
올해도 첫 시작을 알릴 곡을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막을 올리며"를 틀까도 생각했지만 올해는 다른 곡을 선정했다. 창모와 조 레인(Joe Layne)이 함께한 "No Regret"이라는 곡이 있다. 사실 창모의 상황은 나와는 다르다. 그는 "메테오(Meteor)"라는 곡으로 초유의 흥행을 거두기도 했고 본인의 표현으로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을 지도 눈에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다음 정규 앨범 속 창모는 해당 곡에서 이전의 본인을 죽이고 새로 태어난다. 이렇게 성공한 자신을 죽여도 후회가 없고 더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강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다른 상황일지언정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태도처럼 보였다. 성공한 과거는 아니지만 매번 후회만을 감쌌던 나를 죽일 필요가 있다. 자살 시도의 실패로 인한 여분의 삶을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이전처럼 살 순 없지 않겠는가. 부디 올해의 끝에 닿았을 땐 새로운 성장을 바라보고 뿌듯할 수 있길 바란다.
https://youtu.be/ksygC-2_7Hs?si=VPxisP1rZ7_5JRsO
https://youtu.be/24crV7RodTY?si=7PfIhdEyaCO3YFB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