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작업실

세월 앞에 장사 없구나...

by wordsfromulsan

몇 해가 지났지만 잊을 수가 없지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본 그 단골집
잊고 살다 불현듯 며칠 전에 생각나
찾아가 보니 it was gone
그곳엔 휴대폰 가게가 언제나
지 자리였듯 들어서 있더라

에픽하이 "문배동 단골집" 中

작업실처럼 쓰던 카페가 있다. 확실히 집보단 카페가 더 집중이 잘 됐고 내 입맛에 잘 맞는 커피를 마실 수 있음에 만족하던 곳이다. 사장님은 언제나 친근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광경 또한 내겐 평화를 안겨줬다. 물론 다른 카페도 많지만 여기가 유독 내 감성의 싱크와 잘 맞는지 항상 이리로 발이 닿았다. 그리고 당장 저번 주까지도 와서 커피도 한 잔 하고 사람 구경도 했다. 내겐 몇 안 되는 단골집인 셈이다. 그런데 일주일 사이 카페가 변했다.

카페의 유리창은 홀덤이라는 문구가 쓰인 분홍색의 띠지 같은 스티커가 둘러져있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로 올라와야 하는 곳이기에 처음엔 내가 잘못 찾아온 듯했다. 입구엔 A4용지에 쓰인 "카페 정상 영업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페의 약 3분의 2 정도 되는 공간에 홀덤 테이블이 여럿 놓여있었다. 내가 평소 자주 앉아있던 자리마저도 홀덤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다. 너무 낯설었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곳만큼은 절대 안 변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방심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일하던 아르바이트생한테 물어봤더니 사장님도 그대로 계시고 카페도 계속 운영될 거라고 한다. 다만 저녁엔 홀덤에 집중하고 카페 공간이 줄었을 뿐이라고. 사장님도 결국 돈을 벌어야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아시는 거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 켠은 야속했다. 아마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미래를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단골이라는 개념은 기대하지 않았을 때 반갑게 다가오는 단어인 듯하다. 단지 내가 이곳이 좋아서 자주 찾았을 뿐인데 여러 번 와줘서 고맙다며 더 반갑게 인사해 줄 땐 친구도 아닌데 굉장히 반갑고 기분이 좋아진다. 최근에 동네에 있던 타코집에 술 한 잔 하러 갔던 적이 있다. 굉장히 오랜만에 간 거라 사장님은 당연히 나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선 순간 사장님은 뛰쳐나오시더니 "삼촌 너무 오랜만이다!" 하며 너무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장님께 어떻게 나를 기억하시냐고, 울산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주 올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자주 왔는데 어떻게 까먹겠냐고 하셨다. 이런 맞이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더욱 즐겁게 마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거기서 술을 정말 많이 마셨는데 그때마다 실수하고 깽판 쳤다면 사장님은 나를 알아도 모른 척하셨겠지. 누군가의 기억에 반가울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복이구나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내가 자주 닿았던 곳이 사라진 적도 있다. 가장 아쉬웠던 기억은 내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찾아뵈었던 심리 상담 선생님이 계신다. 항상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셨고 내가 무슨 얘길 하던 끝까지 들어주시며 조언과 공감을 무한히 베풀어주셨던 분이다. 그분은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고 그렇기에 나 또한 편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안 좋은 마음들을 꺼내 보일 수 있었다. 두 달간의 상담으로 나는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고, 임금 체불을 겪은 뒤 나는 다시 무너졌다.

그래서 다시금 그 심리 상담 센터에 전화했는데 그 선생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영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계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퇴사를 하셨다고 하더라. 어쩌면 어린아이처럼 가서 찡찡거리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다 일러바치고 싶었는데 그 자리에 안 계셨다. 이제 나는 누구한테 어리광 피우지 싶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참 야속하고 슬펐다. 혹여라도 어디선가 만나게 된다면 여전히 밝은 미소로 나를 맞아주실 텐데.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좋은 것도 좋은 지 모르게 될 거고 고통스러운 건 끔찍하게 내 곁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바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탓에 생기는 내 야속함까지 버리라고 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내 맘 속 어딘가 작은 곳이 텅 비어 버리는데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오늘도 내 작업실과 같았던 카페 자리가 사라졌다. 지금은 자리만 사라졌지만 언젠가는 이 카페 자체가 사라지겠지. 그때는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으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