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드id Jan 03. 2017

시말서 첫 경험, 단단해지는 과정

"회사 벽 뜯고 100만 원 날렸어요"


'층별 보수비용이 50만 원. 합이 100만 원'.
훼손 부분만 보수하면 얼룩이 생겨
벽 전체를 도색해야 한다고 했다. 
청천벽력 진단이었다.


연초면 떠오르는 악몽의 순간. 입사한 지 5개월 차 어리바리 사원 때 사건이다. 입사 후 처음으로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회사 캐릭터를 만드는 업무였다. 수개월 동안 업체와 미팅을 하고 팀 회의를 거쳐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다. 드디어 4가지 최종안이 나왔다. 회사 건물 7, 8층 엘리베이터 옆 벽에 4개씩 보드를 붙여 직원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다.


선호도 조사 기간과 연말 연휴 기간이 겹쳤다. 행여 보드가 떨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됐다. 초강력 양면테이프 덕에 보드는 벽과 혼연일체 됐다. 새해 첫 출근 날, 여전히 잘 붙어있는 보드를 확인하고 모서리를 다시 한번 꾹꾹 눌렀다.


선호도 조사 기간이 끝났다. 보드를 제거하려는 순간! 하나 된 벽과 보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했다. 급한 마음에 힘껏 잡아 뜯었다. 하얀 벽이 갈색(페인트와 벽 뒤 합판이 뜯겨나감) 속살을 드러냈다. 당황한 마음에 다 잡아 뜯어내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덕분에 7, 8층 하얀 벽에는 총격당한 듯한 다양한 상처가 생겼다. 아뿔싸! '시설관리 담당에게 연락할 걸' 뒤늦은 후회였다.


팀장이 출장 중이었다. 보고도 못했다. 빌딩 시설팀에 연락했다. 건물을 훼손했다고 욕만 얻어먹었다. 회사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친절한 답을 받았다. 의지할 곳은 없었다. 냉정한 세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팀장한테 전화했다. 총무팀 담당에게 얘기하라고 했다. 그렇게 조치했다. 하루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퇴근 무렵 총무팀에서 연락이 왔다. '층별 보수비용이 50만 원. 합이 100만 원'. 훼손 부분만 보수하면 얼룩이 생겨 벽 전체를 도색해야 했다. 청천벽력 진단이었다.



"니 돈으로 보수해라. 그리고 시말서 써서 제출해!"


해당 부분 임원의 전화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내 돈으로 보수?'라는 고민보다는, '시말서는 어떻게 쓰는 거야?'라는 고민이 더 컸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인터넷에서 샘플을 찾아 정성스럽게 첫 시말서를 작성했다. 첫 경험을 뒤로하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했다.


다음날 팀장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보고했다. 슬쩍 시말서를 들이밀었다. 팀장은 그 자리에서 박박 찢었다.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상무님, 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일하다가 그런 건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팀장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며칠간 마음고생이 무색하게 한방에 해결됐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이 보시고 뭐라고 하시면 어쩌지…'라는 걱정은 계속 따라다녔다.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벽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페인트 냄새가 향긋하게 코를 자극했다. 다시 직장생활에 평화가 찾아왔다.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시에 사라졌다.


입사하자마자 별 일을 다 겪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회생활에서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상황 아닐까.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배움이다. 회사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죄인이 아니었다. 죄지은 듯 행동했다. 보다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너무 어렸다. 어리바리했음을 인정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많이 자랐다. 시련이 사람을 단단하게 해 준다. 지금 처한 이 시련도 내가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에 대한 꿈을 나눈 이색 송년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