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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Mar 24. 2017

스스로 만든 약점으로 마음 찌르지 않기

'나의 최악을 남들은 쉽게 눈치 채지 못해'


남모르게 고민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남 앞에 서는 게 무척 두렵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호흡은 가빠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은 달아오른다. 사회생활에 있어 최악의 단점이 아닐 수 없다. 남 앞에 무심한 듯, 아무 거리낌 없이 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경이롭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못 가진 것에 대한 남모를 부러움에 위축될 때가 많다.

 

그런 내가 의외로 주변에서 '말 잘하잖아'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정말 친하거나 지극히 편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이다. 쓸데없는 말만 잘한다는 거다. 정작 중요한 발표나 장시간 발표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에는 포기하고 싶을 만큼 신경이 곤두선다. 대학 시절 나서서 과대표도 맡아봤고, 팀 과제 PT도 나서서 해봤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긴장의 순간을 고비고비 넘겼다. 징그러운 숙명이라 여기면서 살아왔다. 주변에는 '하기 싫다' 정도로 표현했고, 남 앞에 서면 기절할 것 같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과제를 했다. 나는 바쁜 일정이 겹치고 겹쳐 조 작업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덕분에 발표를 맡게 됐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발표를 할 수 없다며 거의 빌다시피 했지만, 누가 봐도 발표는 내가 하는 게 맞았다. 바쁜 일정에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수업에 참석했다. 물론 발표 자료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붉은 얼굴,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되고 식은땀이 온몸을 덮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밥도 못 먹은 터라 에너지도 고갈됐다. 입안은 타들어 갔다. 자료를 읽다시피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모두가 놀랐지만, 차마 울트라 초긴장 덕이라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밥을 못 먹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덕분에 남 앞에 서는 일이 점점 더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를 가장한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운영하던 직장생활 관련 블로그를 보고 강의 요청이 왔다.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직장인 자기 계발에 관한 강의였다. 강의 경력 無, 남 앞에 서 본 경험이라곤 대학 시절이나 회사에서 가끔 단 시간으로 PT 할 때뿐. '내가 60명 앞에서 2시간 동안 강의를? 또 쓰려지려고?' 공무원들 앞에서 개망신당할 자신밖에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말도 안 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담당 주무관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집요했다. "블로그 내용이 너무 와닿네요. 책으로도 나오면 너무 좋을 거 같은데요?"라며 나를 구워삶았다.


평소 좋아하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것을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

.

.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가는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고.


양 갈래 길에서의 망설임을 다룬 시다. 내 심경을 오롯이 대변해 주었다.


후회를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 필요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미련이 남는 그런 상황. 하지 않으면 마음은 편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거다. 그런데 포기한 비겁함에 두고두고 머리를 쥐어뜯을 게 분명했다. 흔치 않은 기회를 날려 버린 자책에 평생 시달릴 것 같았다. 자신은 없었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다. 미친 척하고 승낙했다.

   

'스티브 잡스도 중요한 PT에 앞서 수십 번의 리허설을 했다는데, 나는 한 천 번 하면 되겠지?'

 

공무원들 앞에서 기절해 망신당하고, 강의료도 받지 못하는 인생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 자신을 감싸 안았다.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여름휴가를 반납하며 반복에 반복을,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다행히 기절하지는 않았다. 졸도한 모습이 더 극적이었겠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놀랍게도 60여 명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2시간의 강연을 3번이나 무사히 마쳤다. 남들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 내게는 미라클이었다. 주무관은 10분만 듣고 나가려고 했는데, 강의가 재미있어서 2시간을 다 채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못 미더워서 지키고 앉아 있었다는 걸. 그래도 미소 짓고 경청해 줘서 큰 힘이 됐다.

     

두 번째 강의에서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쉬는 시간에 한 공무원 청년이 내게 찾아왔다.


"강사님처럼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남 앞에서 말을 잘 못 해서요."


'누구? 나?' 순간 내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는 남 앞에서는 게 정말 어려워요. 강의는 난생처음이고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라며 내가 강의를 하게 된 사연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해 줬다. 잘생긴 청년은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 덧붙였다. "스피치 학원에 다녀보세요!" 그런 데가 있냐며 좋아했다.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봤다. '그동안 너무 내 단점에만 집착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이 하루아침에 장점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다시 하라면 못 할 거 같다. 지금도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두렵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건 욕심을 좀 버리기로 했다는 거다. 너무 잘하고 싶은, 완벽하고 싶은 내면의 욕심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극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떨리면 떨면 되니까. 누군가가 그랬다. 얼굴 빨개지고 떠는 모습에서 진실함이 느껴져서 더 좋다고. 진실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세상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은 있기 마련이다. 스트레스받기보다는 받아들이고, 강점을 살리면 된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나로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공허한 마음을 극복할 수 없다. 괜히 약점에 집착하며 멀쩡한 마음에 상처 내지 않길 바란다. 강의 듣던 공무원이 부족한 내게 부러움을 느꼈듯, 정작 자신이 가진 '최악의 것'을 남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약점보다 강점을 얼마나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느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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