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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26. 2018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 작은 사건

'여러 명의 아빠가 떠오른 어느 끈적한 여름날'


사상 최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저녁.


퇴근 후 후배와 간단하게 떡볶이를 먹고 커피 한잔 마시고 헤어졌어요. 오후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스마트폰이 알리는 바깥 온도는 33도였습니다. 여의도역에서 전철에 올라 3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종로3가역에서 내렸어요. 어딜 가도 후덥지근했습니다. 손 선풍기를 연신 돌렸지만 36.7도를 훨씬 웃도는 체온들이 쉼 없이 몰려드는 통에 체감 온도는 예측 불가. 등과 이마, 머리에서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좀비처럼 축 늘어진 무더기 인파를 조심스럽게 뚫고 지나는데, 승강장 내 긴 의자를 침대 삼아 누운 40중후반 직장인이 눈에 들어왔어요.  


'성격 더러운 상사에게 시달려서 일찍부터 술 좀 자셨나?'


  지나치는데 움직임이 없어 보였습니다. 오른팔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 맥없이 널브러져 있고요. 숨 쉬는지 확인하려고 셔츠 뚫을 기세로 부푼 배를 가만히 지켜봤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몇몇 사람이 아저씨를 응시했어요. 그때 대화행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놓치면 찜통에서 11분 더 기다려야 했기에 '설마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가던 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100년 만의 폭염으로 연일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기사가 떠올랐어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발길을 잡아당겼습니다. '깨워보고 무슨 일 있으면 119에 신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순간의 긴장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땀이 곱절로 배어 나왔어요. 에어컨을 가득 실은 지하철은 두 눈을 과도하게 깜빡이며 미끄럽게 입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남자분이 호기심과 걱정스러움 반반 담긴 눈빛으로 불쑥 다가왔습니다. 눈이 마주친 찰나 그분에게 암묵적으로 책임을 떠넘기고 들어오는 전철을 맞았습니다. 문이 열리기 직전 힐끗 돌아봤는데, 눈빛 받은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아저씨 팔은 여전히 바닥과 맞닿은 채로 요지부동이었어요.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하더라고요. 찜통 역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대자로 뻗은 아저씨는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거든요.     


  둘째가 비 오는 날 학교에 지각했습니다. 이유를 듣고 헛웃음이 났어요. 단비를 반기며 거리로 뛰쳐나온 달팽이들이 밟힐까 봐 일일이 아파트 화단에 피신시켜 주느라 그랬다고. 잘했다고 안아줬습니다.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기특했어요. 얼마 뒤 보슬보슬 비 오는 아침, 전철역으로 발길을 재촉하는데 엄지손가락 길이의 달팽이가 엄지 한마디만 한 집을 지고 인도를 가로지르고 있었어요. ‘밟히면 큰 소리 나겠구먼’이라는 끔찍한 상상을 하며 슬쩍 피해 대여섯 걸음쯤 갔을까. 아들 얼굴이 아른거렸어요. 저 대왕 달팽이를 그냥 지나치면 왠지 온종일 찝찝할 것 같았습니다. 재빨리 되돌아가 풀숲에 옮겨놨어요.


  달팽이에게도 선의를 베풀었는데… 아무런 조치 없이 전철에 오르는 순간부터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며 죄책감에 시달릴 거 같았습니다. 방관자 효과의 대표 사례 미국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사건도 떠올랐어요. 해외 골프 여행을 가던 일행이 택시기사가 쓰러졌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다른 택시로 갈아타고 떠나 기사가 사망한 사건도 생각났습니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한 장면>

  

  결정적으로 잊은 줄 알았던 몇 년 전 기억이 튀어 오른 거죠. 과한 거래처 접대를 마치고 택시를 탔어요. 내리자마자 너무 힘들어 아파트 앞 벤치에 잠시 앉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흔들어 눈을 떴어요. "들어가서 주무세요"라는 말에 튕기듯 일어났습니다. 곁을 지나던 아파트 주민이었어요.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 택시에서 내린 시간을 확인하니 열한 시. 집에서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어요. 뜬금없이 밀려드는 서러움에 눈물 흘렸던 기억이었죠.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받았던 선의를 저 또한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길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전철을 그냥 보내고 아저씨에게 달려갔어요. 머리가 반쯤 의자를 빗겨 나 있었습니다. 바로 뉘며 흔들었어요. 아무런 반응이 없어 간담이 서늘해지던 찰나 아저씨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이 열렸어요.


"왜 여기서 주무세요? 미동이 없어서 걱정돼 깨웠어요."

아저씨는 큰 눈을 끔뻑이며 "지금 몇 시예요?"라고 물었습니다.

"8시 40분이요."라는 대답에 화들짝 놀라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이어 "아침이에요? 여기가 어디예요?"라고 했어요.

"저녁이고, 종로3가역이에요. 들어가서 주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습니다.


  이날 점심 언론사 국장님을 만나 명을 달리 한 선후배, 친구들 죽음과 직장인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던 거 같아요. 어쩌면 미동도 없이 미간을 구긴 채 거리에서 잠든 직장인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죠. 한편으로는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무작정 달려야 하는 안쓰러운 이 시대 아빠들 얼굴이 오버랩됐던 거 같아요. 내 아버지 얼굴이자 내 얼굴, 친구, 동료들의 모습.


  아저씨의 끈적한 술 냄새를 맡으니 며칠 전 동료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아빠들 노고를 셀프 치하하며 마신 일본 술 '간바레오또상'(아빠 힘내세요)의 은은한 향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이자 '아빠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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