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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Aug 28. 2019

한국인만 집착하는 4가지 나이 공식

"자연스럽고 유연한 관계를 만드는 게 더 좋잖아!"


"너 몇 살이야?"

"나이 많은 게 자랑이냐?"

"나이를 어디로 드셨어요?"


세상에서 제일 흔한 나이에 관한 질문?이다. 무엇을 위한 질문일까. 궁금하다.


어리면 나이 많아야만 할 수 있는 짓을 하고 싶어 안달, 나이가 적당히 많으면 어려 보이려고 안달, 나이가 상당히 많아지면 대접 받고 싶어서 안달 하지만 누군가는 '나이 많은 게 벼슬이냐'고 안달. 나이에 안달 난 우리 민족. 외국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유독 나이에, 숫자에 집착하는 문화가 강하다.

 

불쌍한 우리 엄마, 억울하게 이틀 동안 나이 두 살이 훅 늘어난다. 12월 31일에 낳아주신 외할머니 때문이자, 세계에게 유일무이한 한국식 나이 계산법 덕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태어나면 1살, 해가 바뀌면 또 한 살이 더해진다. 이 같은 나이 계산법은 개인적인 불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정립이나 법적인 나이 계산에도 혼란을 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주고받는 "몇 살이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법률관계나 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나이가 다 제각각이니까.


한국식 나이 셈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사용했던 계산법이다. 하지만 중국은 1960년대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일본은 1902년 법령을 제정하면서 나이 계산법을 만 나이로 통일했다. 북한에서도 1980년대 이후 만 나이를 적용하고 있다.


고로, 대한민국 국민의 나이 계산법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머리를 잘 굴려서 나이를 따져야 하는 순간이 왕왕 발생한다. '잠깐만, 내가 몇 살이지?'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띠는 음력으로 따지면서 나이는 1월 1일이 기준인 참으로 아리송한 나이 문화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유열의 음악 앨범' 스틸 컷>

  

"근데 누나 몇 년생이세요."

"나 75."

"나도 75년생인데."

"빠른 75야. 내 친구들은 74년생이야."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다.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괜찮아. 말 편하게 해"라고 했지만 주인공이 정해인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군 제대 후 전공을 바꾸기 위해 미술 학원에 다녔다. 나이가 엇비슷한 동병상련의 또래들과 친구로 지냈다. 하루는 그중 한 명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자기 생일이 2월이어서 나보다 학교를 일 년 먼저 다녔다고 했다. 친구들은 나보다 한 살이 많다고. 내 생일은 6월이었다. 4개월 차이. 동갑으로, 친구로 인정하기 싫다는 말이다. 난 정해인이 아니었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기 싫어 '누나!'라고 크게 불렀다. 누나는 흡족해했지만 다른 친구들과 호칭이 꼬여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이처럼 1, 2월이 생일인 '빠른 년생'을 만났을 때 나이 계산 방법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엄밀하게 말하면 서열 정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나이 다른 학번이나 같은 학번 다른 나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 빠른 년생 문화는 음력 중심인 유교 문화가 양력 중심의 서양 문화와 만나는 가운데 발생한 사례로 분석한다.


군대에서 만난 한 살 위 형이자 선임은 나를 친동생처럼 챙겼다. 어느 날 우연히 신분증을 봤는데 동갑. 생일이 4개월 빨랐다. 일명 빠른 년생. 하지만 학번은 같았다. 제대 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고참은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제 동기와 친구로 지냈다. 나 역시 동기와 친구. 동갑인 선임에게 셋이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더니 난색을 표했다. 지금도 형이라고 부르고 있. 사실 안 만나면 그만이었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은 회사에서 또 만났다. 그것도 한참 선배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호칭은 업그레이드 "형님!"이 됐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대학교 3학년 시절, MT 가는 길. 버스 옆자리에 앉은 같은 과 형이 지갑을 꺼낼 때 우연히 주민등록증을 봤다. 동갑. 심지어 빠른 생일도 아니었다. 편입생이어서 나이를 잘 몰랐고, 형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아, 뭐야? 동갑이야? 친구네."

"출생 신고를 늦게 한 거야."

"에이~ 우리 시대에 무슨. 뻥 치지 마."

"그럼 앞으로 나한테 말 시키지 마."

...


농담으로 한 말에 정색해 당황했다. 과 형은 MT를 마친 다음 주에 너덜너덜한 출생증명서를 가져와 당당하게 보여줬다. 나보다 10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걸 꼭 알려주고 형 대접을 받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한 살 많은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재수해서 동기가 된, 엄밀하게는 형들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나이를 밝히지 않았고, 같은 학번이니 동갑인 줄 알았다. 나이를 알게 된 후에도 계속 친구로 지냈다. 이미 절친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무슨 엉망진창 나이 체계인지. 따지고 보면 아무 기준이 없다. 재래시장에서처럼 흥정하고 후려치면 그만이다.


학창 시절 같은 학년, 같은 반 아이들과는 무조건 친구다. 그 누구도 빠른 년생 친구를 동생 취급하지 않는다. 아무 의심도 사심도 없는 동등한 관계니까. 그런데 이런 암묵적 동조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스무 살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빠른 년생들은 이른바 족보브레이커로 불린다. 한 살 차이로 형, 누나, 언니, 오빠 등 서열을 정리하는 한국인의 본능(정서)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는 재수라는 복병부터 군대라는 변수, 어학연수, 휴학 등이 뒤섞이면서 족보가 꼬인다.


지긋지긋한 나이에 대한 집착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열 살 어린 회사 후배는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한 살을 올려 말한다. 빠른 년생이라 함께 학교에 다닌 친구들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거다. "학교 다닐 때나 친구지"라는 내 말에 똥 씹은 표정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이미 또래끼리 서열을 정리한 터라 그 족보를 유지해야 했던 거다. 참 아이러니한 제3의 서열.


이러한 웃픈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지난 2009년에 초, 중등 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빠른 년생 조기 입학의 폐지. 법적 기준에 따르면 빠른 년생의 마지막 세대는 '빠른 03년생'에서 종결된다. '빠른 년생'이라는 말도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숫자에 집착하는 대한민국에서는 나이에 대한 논쟁, 서열에 대한 눈치 작전이 여전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여전히 생존해 있는 빠른 년생에 대한 논쟁도 지속되겠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매년 한국식 나이를 폐지하고 만 나이로 바꿔야 한다는 제안이 꾸준히 올라온다. 나이 때문에 골머리 앓는 국민들 염원이 전해진 걸까. 지난 1월에는 연령 표기를 '만 나이'로 통일, 일원화하자는 법률안이 제출됐다. '만 나이 셈법'은 0살로 태어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1살씩 먹는 방식이다.

한국인은 네 가지의 나이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식 나이, 만 나이, 연 나이 그리고 빠른 년생. 빠른 년생은 사회에 나오자마자 골치 아프고 난처한 서열 정리에 직면하는 안타까운 숙명을 타고났다.


태어난 날수 차이도, 년도 차이도 아닌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나이를 구분 짓거나 학번, 기수로 수직적인 서열 관계를 만드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구시대적인 대물림이다. 어설픈 기준으로 벽을 세우는 관계 정립보다는 자연스럽고 유연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숫자에 집착하는 것보다 남다른 인격으로 존중받는 게 더 의미 있는 일 아닐까.


대한민국에서도 '만 나이'가 빨리 정착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세월을 거슬러 하루아침에 전 국민이 두  줄어들 테니까. 세월을 역행하는 젊은 대한민국 탄생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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