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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Nov 01. 2019

누군가를 단번에 아는 척! 착각하지 않기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없잖아"


시종일관 못마땅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입원하자마자 병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다. 끊임없는 잔소리, 한결같은 불평불만, 간호사를 수시로 호출하고, 마음대로 창문을 열고 닫고, 불을 켜고 끄고. 사람들 인상이 점점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고관절 수술 후 몇 주 병원에 머물렀다. 오랜 입원생활에 건너편 침대의 환자가 여럿 바뀌었다. 엄마의 퇴원 며칠 전, 예순둘의 한 아주머니가 입원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불평불만을 쏟으면서 수시로 간호사를 호출했다. 밖에서 어렴풋하게 들리는 "아, XXX 환자 또 호출했어"라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병실 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호사들 표정에서도 피곤함을 역력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와 간병 교대를 하던 아내도 인증했다.

 

"저 아줌마가 엄청 까칠하니까 조심해."


병실 화장실에 들어가는 아들한테 밖에 있는 화장실을 쓰라고 했고, 엄마 보고는 냄새난다며 화장실 문을 잘 좀 닫으라고 지적했다. 덥다고 수시로 창문을 열었다가 닫고, 간호사에게 에어컨을 틀라는 냉랭한 컴플레인 했다.


문병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저렇게 까칠하니까'라는 생각을 슬쩍 품어버렸다. 어쩌면 혈혈단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병실의 누군가와 불편하게 지내는 게 싫어서 일부러 그분을 챙겼다. 솔직히 말해 나 엄마를 건드릴 여지를 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음식을 나눠 드리고, 더워서 잠을 못 자겠다기에 손선풍기를 건넸다. "그거 가지고 되지도 않아"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발 다가선 거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마음의 빗장을 살짝 열어 둬서일까, 식사를 하는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자신의 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마주 보며 식사하기 불편해 반쯤 끌어둔 커튼을 슬며시 밀고 아주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은 S 전자에 다녔다고 했다. 회사에서 등산을 하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고. 수술할 때 의사가 신경을 잘못 건드려 원인모를 통증에 평생 시달리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줬다. 회사에서 산재로 인정해줬지만 통증 때문에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모르핀을 달고 살고, 너무 괴로워서 신경이 예민하다는 심경을 전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울컥. 그런데 더욱 아픈 이야기다음이었다.


39살에 남편이 바람났다 운을 뗐다. 내연녀와 둘이 찾아와 이혼해 달라고 했지만 버텼는데, 남편은 여자를 집으로까지 끌어들였다고 했다. 끝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자, 남편은 집을 나가 딴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홀로 아이를 키우다 사고를 당한 거라고. 자식이 성인이 됐을 때, 둘을 불러 앉혀 놓고 이혼 도장을 찍어줘 버렸다차분한 투로 말했다.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모르핀 같은 약효 때문이겠지.


여기서 끝난 줄 알았는데 경악스러운 일은 최근에 일어났다.  남편에게 다시 받아 달라 전화가 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인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고, 치가 떨리고, 소화도 안 돼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뿐 덤덤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에 빠져 있다기보다는 삶을 잠시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기구한 운명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 참 많다. 드러나지 않아, 스스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 조용히 사는 사람도 많을 . 절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없을 텐데, 자신의 인생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털어내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위로를 바라지도, 남편 욕을 함께 해주기를 바란 것도 아닐 거다. 다만 누군가에게 쉽게 보일 수 없는 가슴의 상처를 조금라도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 싶었을 거다. 우리 역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그저 망연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이자 변호사인 직 루빈(Zick Rubin)이 기술한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이라는 용어가 있다.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은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사람의 심리를 말한다. 내 과거를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사람에게 나의 비밀과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대답이나 조언을 구하는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독백이라는 것이다.


아주머니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병원을 떠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우리를 향한 독백. 그녀의 좌절과 상심은 누구의 어설픈 헤아림이나 위로조차 들어설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혼자만의 것이었다.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외로움을 앓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까칠한 모습 뒤에 숨겨진 고난한 인생, 몸과 마음에 얇은 상처들이 겹겹이 새겨지는 과정을 경청하면서 느꼈다.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는 내 마음의 얕은 그릇을 깨버려야겠다고. 무서운 세상이라고, 날카로운 세상이라고 누군가를 너무 쉽게 재단하고 있다고.


잠깐 본 아주머니를 두고 '조심해'라는 말을 남긴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심리 상담사로 일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쉽게 판단해. 지내다 보니까 아주머니 괜찮으시던데?"라고.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나와 함께 살았던 부모님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차 가물가물하다. 상당 부분 기억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의 그 복잡 미묘한 삶 두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샅샅이 알 수 없다.


'엄마가 뭘 알아', '아빠가 뭘 알아', '당신이 뭘 알아'라고 외치는 우리지만, 정작 우리는 그들을 알고 싶고, 이해하려 했던 적이 있던가.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알기 전에 마음의 문부터 철커덩 걸어 잠그기 바빴던 내가 떠올랐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들어오는 건 누군가 자유이고, 나가는 것, 머무는 것도 그 사람의 자유다. 굳이 내가 미리부터 빗장을 걸고 先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마음을 닫았기에 주머니가 담고 있는 이면의 사연을 헤아리려는, 들여다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 내 마음이 너무 얕아 원인 모를 통증을 홀로 감내하는 아주머니에게 함부로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이라는 오명을 씌운 그 순간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부시시 물들어 버린 편견이라는 굴레 속 집착과 착각. 아픈 와중에도 아들이 결혼 준비로 바쁘다고 말하 보인 옅은 미소. 그분에게서 본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였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스펙터클하고 인간의 마음은 그 곱절 이상으로 복잡 미묘하다. 참 어려운 인생,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덜 실수하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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