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갓집에 다녀오는 길. 충청도의 한 역에서 서울행 KTX를 탔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출발한 지 1~2분 정도 지났을까. 음악 소리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음이 귀속으로 들이닥쳤다. 열차 내 사람들 고개는 일제히 뒤쪽을 향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한쪽 이어폰을 뺐다.
관계자 : 원칙상 열차를 멈출 수 없습니다. 해당 역에 연락하세요!
아 빠 : x발 그러니까 연락을 하라고! 다섯 살짜리 애가 못 탔다고!
관계자 : 그러니까 역으로 연락하시라고요!
아 빠 : 아니 무전 치면 금방 연락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관계자 : 왜 반말하고 소리를 지르세요?
아 빠 : 너도 소리 질렀잖아! 애가 못 탔다니까! 진짜!
관계자 : 역으로 연락하시라고요!
엄 마 : 우리가 역 연락처 찾는 거보다 빠를 거 아니야! 애가 혼자 있다고! 지금!
아이 엄마도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가세했다. KTX 직원과 부모의 요점을 벗어난 되돌이표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내 속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아이는 뒷전이고 목청 데시벨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
대화를 중간부터 들었지만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에서 한 가족이 정신없이 열차에 탔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 혼자 못 탄 상황. 아이 아빠는 다급하게 열차를 세워 달라고 했고, 관계자는 열차를 세울 수도, 역주행할 수도 없다고 답변한 거다. 다급한 아빠는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했고, 열차 관계자는 그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나 나 몰라라 하면서 조치 없이 대치하는 상황. 죄 없는 아이만 점점 더 부모와 멀어지고 있었다.
듣다 못한 한 어르신이 중재에 나섰다.
"그만 좀 하시고. 애가 지금 혼자 있다는데. 무전기로 연락해서 데리고 있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양반들 진짜 뭐 하는 거야."
이어폰으로 다시 귀를 막고 볼륨을 더 키웠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자신들 감정에 취해 싸우고 있는 모습, 화가 난다고 아이를 방치하는 관계자 모습에 내 심장이 벌렁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대화의 본질은 멀찌감치 밀어 버리고 감정싸움에 심취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한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다시 말해 봐"로 시작되는 다툼 대부분이 대화의 본질에서 비껴 난 시비다.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말 꼬리잡기 게임.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도 싸움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당신? 너 몇 살이야? 얻다 대고 당신이래? 너 같은 자식이 있어!"
"나이 많아 좋겠다. 근데 나이를 어디로 먹었냐?"
이 같은 전개는 결론이 날 수 없다. 누군가 나서서 말려야만 끝나는 네버엔딩 싸움이다. 많은 사람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답답함을 느껴 본 적 있을 거다. 친구, 배우자, 애인, 상사, 선배 또는 부모님. 결론 나지 않는 무한 반복의 아무 말 대잔치를 겪어 본 사람이면 이런 불통의 대화가 동반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을 거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상황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그런데 가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본격적인 설전이 벌어지기 직전 누구 한 명이 상대의 말에 수긍하면서 대화가 쉽게 종결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흥분하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대화가 다툼으로 번지지 않고 순탄하게 일단락되는뜻밖의 행운이다. 이는 누구 하나가 손해 보는 게 아니다. 지는 것도 아니다. 가뜩이나 사는 게 버거워 에너지 소모 많은 세상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방출을 사전에 방지하는 현명한 처사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예상과 달리 발끈하지 않을 경우, 자기가 잘한 줄(이긴 줄) 알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다. 이에 동요하고 반응하면 안 된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잘됐다'라고 생각하는 게 이득이다.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았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론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악순환과 괜한 에너지 소모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무대응이 전략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말을 아껴야 한다. 괜한 변명과 화는 또 다른 변명과 분노를 만들지만, 적당한 침묵은 후회예방 효과를 머금는다.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기준이 필요하다. 몇 마디 나눠보고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펼치는 거다. 완벽하지 않아도, 정답이 아니라도 내 생각(판단)의 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나만의 대응 기준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줄여 줄 테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그 다급함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장 열차를 세우라고 소리 지르는 대신 애가 혼자 역에 남았으니 빨리 역으로 연락 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을 건네었다면 어땠을까.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전달돼 대화는 다툼 없이 짧게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아'와 '어'를 달리 받아들인다는 걸 늘 명심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