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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Apr 22. 2020

자기만 정답이라는 웃기는 사람

'세상 어떤 일에도 정답이 하나일 수 없다'


머리에 자기만의 답이 박혀있는 사람이 많다. 고개를 끄덕이는 척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자기 생각의 틀 안에 머무른다. 답이 늘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무조건 '아니지 아니지'를 남발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싫다. 자기 의견이 너무 확고하면 상대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시로 말 끊는 사람에게는 벽을 친다. 점점 입을 닫는다. 몸과 마음에서 조금씩 밀어낸다.


"수고했어. 그런데 김대리는 이사님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생각해?"

"네. 회의 때 별말씀 없으셨는데요."

"그래 알았어. 진행해. 그런데 나는 물량 추가가 더 효율적인 거 같은데. 아니 내가 임원이면 그렇겠다고."

"팀장님 의견 반영해서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든가."


후배와 팀장의 대화다. 이번에도 괜한 시간 낭비와 감정 소모로 마무리됐다. 업무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법무부 장관이 왜 문제인지, 나라 경제가 왜 어려운지,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다른 팀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모든 답을 자신의 머리에서만 찾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다. 특히 직장 내 권력자는 더더욱 그렇다. 도서 <승자의 뇌>에서는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고 주장다. 권력에 중독되면 목표 달성과 자기 고집에 집중하면서 공감능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 공감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만 퍼붓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권력자 즉 상사는 일 잘하는 직원만큼 듣기 좋은 말 잘하는 직원도 선호한다. 그다지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사람 마음은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오늘도 내가 맞다는 걸 입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중 일부분은 가식이라는 걸 모른다는 데 있다. 때문에 상대 마음은 1도 헤아리지 않는다. '내가 다 맞는데, 왜?'라는 착각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소리만 듣고 싶다면 최소한 상대에게 듣기 싫은 말만 골라해서는 안 된다. 현명하고 옳은 말과 권위에 찌든 말은 분명 다르다. 누구나 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직장에서 욕을 넘어서는 거북스러운 말은 '답정너'다. 상대는 자신의 모든 걸 부정당하는 감정을 느낀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다.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열린 결말을 내어 주어야 한다. 귀와 마음을 열어야 누군가 다가와 입을 열 수 있다. 오늘도 뻔에 뻔한 답을 내놓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괴로움 그 자체다. '답정너'가 무서운 이유는 의욕을 저해하고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대화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대충 준비해서 가면 돼. 어차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거든."


동료의 정신세계를 검은 기운이 휘감은 거 같았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알기에 닥치기도 전에 짜증부터 난다는 푸념은 덤이었다. 무엇이든 간에 결말을 미리 알면 기대도 설렘도 없다. 뻔한 답을 내주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는다. 변화를 거부하고 조직을 퇴화시키는 불필요하고 말 안 통하는 사람으로 여길뿐.


상사뿐만이 아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새겨들어야 한다. 세상 어떤 일에도 정답이 하나일 수 없다. 후배의 말, 부하직원의 말, 자식의 말 모두가 답이 될 수 있는 시대다. 답을 정해주는 게 권위를 지키는 시작이라는 착각을 이젠 버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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