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오래 하면 무수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중 가장 큰 깨달음은 바로 위치가 바뀌면서 느끼는 격세지감이다. 후배나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이러한 감정을 마주하면 내가 저질렀던 만행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사원, 대리 때는 소박하게 시키는 일 위주로 한다. 조금 더 올라가 직급에 '장'이 붙으면 조금은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 진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직장생활 동안 뭔가를 통달한 거 같고 잘난 체, 아는 체 같은 걸 하고 싶다. 의욕이 넘칠 때면 상사를 달달 볶기도 한다. 그릇이 넉넉해 후배의 과한 의욕을 너그럽게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후자는 스트레스를 듬뿍 받는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내뱉던 말을 다른 입을 통해 듣게 되니 마음이 무겁고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몇 년 전 처음 팀장직을 맡은 선배에게 내가 맡은 일을 빨리빨리 처리하고 싶어 쉽게 쉽게 말했다.
"상무님께 말씀하셨어요?"
"거래처에 전화하셨어요?"
"대표이사 보고 빨리 해주세요."
"결재하셨어요?"
"그걸 왜 우리가 해요? 안 한다고 해야죠."
열정을 핑계 삼아 상사에게 모두 떠넘기는 말이었다. 책임지는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보란 듯이 내뱉을 수 있던 말. 말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건 차석이 되면서부터다. 팀장이 없으면 팀장 비슷한 역할을 해야 했다. 묵직하게 짓누르는 부담이 컸다. 대단한 역을 맡은 건 아니지만 팀장이 없으면 마음이 늘 불편했다.
세월은 금세 흘렀고 상황도 변했다. 팀장은 아니지만 조금 더 부담스러운 자리에 올랐다. 해야 할 역할에 부담이 생기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열정보다는 냉정과 이성이 먼저였다. 관리라는 부담과 책임이라는 화살이 여기저기서 날아드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경험이 스승이다'라는 말을 사랑한다.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많으니까.
"아니꼬우면 네가 팀장 하던가?"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상사의 말도 어쩔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삐딱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체크해 놓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배가 업무를 재촉할 때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 팀장을 못 믿어 닦달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다.
못마땅하게 여겼던 선배 마음을 나이가 들면서 이해한다. 받아들일 수 없던 그의 행동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과거를 돌이키며 현실을 배운다. 후배를 통해 선배 마음을 느낄 때, 그들을 불편하게 했을지 모르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뜬금없는 안부를 묻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돌고 돌아 비슷한 처지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며 살아간다는 방법을 배운다. 지금의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서 인간은 무럭무럭 성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