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는 후배는 시종일관 과중한 업무의 피곤함과 회사가 선사한 불행한 보따리를 풀었다. 일상의 못마땅함을 가득 품고 자신이 얼마나 회사에 헌신하는지를 털어놨다. 얼마 뒤 더 이상 못해먹겠다며 포기 선언을 했다. 이직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주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 윗사람의 깊은 총애를 받는지에는 무관심했다. 사람은 편협한 자신만의 기준을 품고 살아간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남 일이 아니다. 나 역시 편협하게 살고 있다.인정받는다는 걸 빼면 후배와 다를 바 없다. 원래 그랬던 건지, 시나브로 물들었는지,세월이 하수상해서 잠시 정신이 나간 건지,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행복해'라는 말을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라는 사실이다. 일상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얼마나 행복한지가 아닌, 얼마나 힘든지를 먼저 보여주려고 용쓰며 사는 나와 매일 마주한다.
내가 회사에서 어떤 취급받는 줄 알아?
회사 발전에 일조하기 위해 출근한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였더라? 월급에 희생당하러 기어나간다는 잡념만 가득하다. 일할 직장이 있기에, 꼬박꼬박 월급을 받기에, 가족과의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인하기 바쁘다. 자아실현을 위함이 아닌 시간과 자존심을 바치러 직장에 나간다는 걸 보여주려 애쓴다. 가족에게도 행복과 즐거움보다 그들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보여 주고 싶어 안달하기도 한다. 친구가 부부싸움을 하다 "내가 회사에서 어떤 취급받는 줄 알아?"라고 소리쳤다.후배들은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는데 익숙하고, 선배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고 표정으로 보여준다.
'나 이만큼 힘들어 누가 좀 알아줘!'
자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텅 빈 허공에라도 발버둥을 친다. 휴대폰을 만질 수도 없을 만큼 꽉 들어찬 지하철에서 인파에 압사당하기 직전 생각했다. '왜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지?' 한 여름 한없이 땀 흘리며 사람들과 부대낄 때도, 한 겨울 롱패딩 입고 지하철 안에서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 못 하는 치졸한 속마음일 뿐이다.
현대인은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삶을 내어주고 고통을 감수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듯하다. 나 역시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면 긴 한숨부터 밀어낸다. 이 또한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기척이다.
"뭐, 해먹고 살 게 그렇게 없을까? 직장인 밖에?"
"그래도 누군가는 너무도 다니고 싶어 하는 곳이니까 일단은 다니는 걸로 해요."
한참 어린 후배지만 선배의 우문에 넉넉한 마음으로위로를 내어주었다.삶이 기쁨만을,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안다. 하지만 고통의 강도를 감당할 수 없는 증거가 속속들이 등장하면 겁부터 난다. 자신의 헌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괴로움에 허우적거리는 스스로를 감당하기 벅차 무작정 도망치고 싶은 직장인의 단순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직장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포기와 분노가 아닌 나를 좀 봐달라는 외로운 외침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