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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May 04. 2020

33일의 휴가가 주는 미친 불편함

'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


한 달 휴가다. 주위 사람들 반응은 대부분 "진짜 부럽다"다. 처음에는 그럴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하루하루 불안하고 불편하다. 휴가 전 거창하진 않아도 대략의 계획을 세웠다. 설렜다. 막상 휴가에 돌입하니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 점점 커졌다. 사람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나 일 걱정 때문이 아니다. 불안한 이유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몰라서다. 놀아본 놈이 놀 줄 알 듯, 쉬어본 놈이 쉴 줄 는 법이다. 학창 시절 이외에 장기간 쉰 적이 없다.


2006년 입사해 지금까지 지내는 동안 가장 긴 휴가는 일주일이었다. 앞뒤 주말까지 합하면 9일. 이 기간에는 의외로 할 일이 많다. 휴가 명목이니 가족과 며칠 여행을 다녀다. 남은 시간에는 자유를 만끽하면 그만이었다. 비슷한 패턴으로 십수 년이 흘렀다.


그런데 진급하면 주어지는 안식월 제도가 생겼다. 갑작스럽게 33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흔치 않은 기회, 가족과 긴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다. 코로나19가 가로막았다. 휴가 시작하자마자 짧지만 알찬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평일에는 출근한 아내 대신 집에서 수업하는 남매를 챙기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의미 있고 소중하다. 하지만 시로 검은 긴장감이 엄습다.


성격상 가만있지 못하고 바쁘게 살던 몸이라 없는 시간을 쪼개는 건 도가 텄다. 한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책 읽는 것도 글 쓰는 일도 잘 안 된다. 책은 출퇴근길 전철에서만 주로 읽었다. 글쓰기도 자투리 시간에 집중하는 게 더 익숙하다. 뭐든 다급하게 처리하던 습관에 점령당해 버렸다. 여유로움치였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허공에 손만 휘젓고 있다.


폼나게 푹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다. 마음이 안 따라준다. 누워도 심장이 자꾸만 요동친다. 움직이기는 귀찮은데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쯤이면 다. 현대인의 불안증이랄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마구 불안 증세.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다. 벌써 13일이 지났다. 여유롭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휴가를 보내고 싶은데 본질 없는 잡생각에 사로잡다.


지독한 독감에 걸려 2주 넘게 골골거렸던 적 있다. 아픈 와중에도 불안에 시달렸다. 초조해하는 내게 친구가 쏜 말이 가슴에 박혔다. "넌 가만히 있는 연습을 좀 해봐."

 

책 <착각은 자유지만 혼자 즐기세요>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치열하게 사는 것은 현대인의 숙명이라지만, 잠시 하늘을 올려보며 여유를 찾는 것은 선택이다. 열심히 사는 이들이 번아웃증후군에 맥을 못 추는 것도, 행복강박증에 시달리는 것도 어쩌면 잠깐의 '쉼'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강박이라는 호흡곤란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건 잠시 쉬어가는 연습이다. 그래야 고른 숨을 오래오래 내쉴 수 있을 테니까."


잠깐의 쉼을 넘어서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호흡곤란 예방을 위해 쉬는 연습이 절실하다는 걸 알았다. 직장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긴 휴가. 조금이라도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게 필요한 건,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긴 휴가라는 양적 숫자가 아닌 무사안일하게 쉴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라는 걸. 그래야 고른 숨을 오래오래 내쉴 수 있을 테니까. 한 달 뒤 또 다른 시작에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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