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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un 25. 2020

3개월 단기 알바생 신분 구제 사건

'좌절에서 건져 올린 작은 기적'


비슷한 또래의 대기업 직장인 속
일개 알바생이라는 현실이 초라했다.
말끔한 정장 사이 청바지 차림은 나뿐이었다.


겸손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지 십 수년 째다. 대기업에 다니지만 출신 성분이 남다르기에 생존방법으로 '겸손'을 택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으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위풍당당하고 찬란한 대기업 성골(공채)을 우러러보던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생 출신이다.


작은 언론사에서 인턴 기자로 근무했다. 3개월 만에 잘렸다. 취재뿐만 아니라 광고 영업도 시키는 곳이었다. 영업은 체질도 아니었고, 내키지도 않았다. 국장과 3.1절 행사 취재를 갔다. 사진 찍고 취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간이었다. 국장 카메라 렌즈가 사라졌다. 300만 원이 넘는고 했다. 물어내라고는 안 했지만, 은 구실이었다. 영업도 못하고 사고 친 인턴 기자는 조용히 잘렸다. 세운 이유는 경영악화.


재취업 기회를 노리며 놀고 있었다.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단기 알바 소개였다. 내 나이 30개.

 

이 나이에 쪽팔리게 무슨 알바?


대기업이라는 말에 흔들렸다. 엄마를 피해 아침마다 백수 친구와 약수터에 오르는 일에도 지쳤을 때였다. 면접을 봤다. 고맙게도 대기업은 백수 대학원생인 나를 택했다. 경쟁률 1:1 무지하게 급한 채용덕이었다. 3개월 출산 휴가를 떠나는 직원이 잠시 내어준 고마운 자리다. 목요일 면접 후 팀장은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내 의사 같은 건 묻지 않았다. 하지만 "네!" 호기롭게 답해야 했다.


바빴다. 미친 듯이 일했다. 시키면 다했다.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회사에 홀로 남아 12시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 데이트 미루고 일했다. 여자 친구가 회사로 쳐들어 온 일도 있었다. 결코 야망이,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일이 더럽게 많았을 뿐이다.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조금씩 주변을 의식하게 됐다. 비슷한 또래의 대기업 직장인 속 일개 알바생이라는 현실이 초라했다. 말끔한 정장들 사이에 청바지 차림은 나뿐이었다. 세상에 패배한 기분이었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 초라함을 들키지 않는 방법은 겸손한 태도뿐이었다.


팀원들, 주변 사람들과 친분이 쌓이는 만큼 소외감과 괴리감, 열등감 커졌다.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우월한 이들도 나를 보며 하찮은 감정을 키웠다. 카드키를 찍을 때 누군가 옆에서 '삑 알바입니다'라며 키득거렸다. 농담인 걸 알지만 얼굴은 달아올랐다. 명절에 모두가 현금 보너스를 받을 때 참치 캔이 가득한 선물을 들고 퇴근했다. 손도 달아올랐다.


소외감과 괴리감, 열등감을 계속 달고 살진 않았다. 조금 내려놓으니 편했다. 어차피 나는 3개월 뒤 떠날 사람이었다. 커다란 조직을 떠나는 게 두렵고 아쉬웠다. 시간은 빠르고 3개월은 짧았다. 90일이 턱 밑까지 찼을 때 팀장이 불렀다. '선배들이 나를 두고 책임감 있게 일한다고 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일처리가 빠르다고 나를 칭찬했'라는 말을 해줬다.


내가 알바 신분 구제해 줄게.


팔짝 뛰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만 당장 TO가 없으니 3개월 더 알바생 신분을 유지하라고 했다. 신분은 여전히 알바였지만 마음은 이미 대기업 신입사원이었다. 구제해 준다던 팀장이 얼마 뒤 몸이 아파 병가에 들어갔다. '그럼 제 신분 구제는요?' 3개월 뒤 인사팀장이 불렀다. 팀장이 병가 전 인사팀과 협의를 마쳤다고 했다. 정확히 3개월 뒤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들처럼 사번이 생겼다. 카드키를 받았다. 월급이 늘었다.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자존심 추락은 끝이 없었다. 무시의 대상에서 시기의 대상이 됐다. 내가 입사함과 동시에 한 명이 다른 팀으로 빠졌다. 그 자리가 내 차지였다. 알바 출신 굴러온 돌을 대하는 정서는 남달랐다. 사람들은 박힌 돌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쟤가 xx 쫓아냈잖아'라는 말을 면전에서도 고, 소문으로도 퍼뜨렸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불편했다. 어이없음을 고마운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희석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시간이 도움을 준 덕에 조금씩 조직에 녹아들었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열심히 일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렸다. 뒤처진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부단히 애썼다. 박힌 돌들에게 밀리기 싫었다. 정신은 늘 바짝 차리고, 몸은 바삐 움직였다.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생에서 계약직 1년을 거쳐 정직원으로 승격됐다. 대졸 입사자와 같은 조건이었다. 팀장이 애써준 덕이었다. 진급도 차근차근했다. 시나브로 무탈한 직장인으로 성장했다.


이하루 작가가 <현관 벨이 무섭게 울려댔다>에서 "잘 쓴 에세이는 나를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에세이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경청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아내가 친구에게 '우리 오빠 아르바이트하다 입사했잖아'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불같이 화를 냈다. 쪽팔리게 그딴 소리를 왜 하냐고. 려한 백조 머리만 내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말한다. 이하루 작가의 말처럼 나를 드러내는 용기는 삶의 어느 순간에나 필요하다.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을 때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 알바시절부터 진땀 흘리며 일하 내 모습이 보인다. 남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패배에서 건져 올린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망각의 약인지라 대부분의 사람은 알바시절 패배자였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도 쓰디썼던 그 순간이 희미할 정도니까. 하지만 예외는 늘 있다. 여전히 나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후배들에게 '쟤 알바 출신이잖아'라는 말을  종종 꺼낸다. 나보다 훨씬 먼저 입사했던 그 사람보다 이제는 내 직급이 더 높다. 알바 출신이라는 패배감은 이제 나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내 패배감이 '쟤 알바 출신이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옮겨간 듯하다. 다만 알바시절부터 품었던 겸손한 마음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아직도 나는 겸손함과 함께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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