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를 찾았다. 일하면서 남편이랑 자식들 챙기고, 아픈 시어머니 뒤치다꺼리까지 하는 딸이 안쓰러운 건 당연지사.장모님은딸 걱정이 한 보따리였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병수발 들던 당신처럼 사는 거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묵묵히 곁에서 밥을 먹었지만 씁쓸했다. '사위를 면전에 두고 아픈 엄마 안위는 뒷전인가?' 머릿속이 악마의 낙서로 가득 찼다. '이래서 가족이 아프면 불화가 일어나고 힘들어진다는 걸까?'라는 생각이 만개했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처가 부모님을 모시고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동료가 떠올랐다. '장모님은 왜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하셔?'라는 주제의 토크가 발단이 돼 아내와 냉전 중이었다. 며칠 뒤 내 상황? 갑자기 검은 낙서를 뚫고 나온 천사가 속삭였다. '어느 부모라도 자식이 우선일걸. 당연한 일이야. 너네 엄마도 그랬어. 너 역시 비슷한 상황이면 어찌 됐든 자식이 먼저일걸?' 천사의 속삭임은 얼마 전 엄마의 말을 소환했다.
"사위가 설거지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하는 건 안쓰럽네."
평일에는 아내가 엄마를 돌본다. 나는 아이들과 주말마다 엄마 집을 찾는다. 항암 치료로 힘겨운 엄마를 대신해 가끔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설거지를 끝내고 배 부분이 다 젖은 아들을 보고 엄마가 한 말이다.
"사위가 설거지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하는 건 안쓰럽네." 엄마는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 부모도 마찬가지여서 다행이다. 엄마는 항암 치료 시작 전 누나네 집에서 3주 정도 머물렀다. 그때 설거지하는 매형을 봤다. 엄마의 뇌는 순간 기특함을 떠올렸다. 그런데 설거지하는 당신 아들을 향한 마음은 달랐다. 물론 며느리를 향한 비난의 의미를 머금지 않았다. 나는 평소 아내가 없을 때만 설거지를 한다. 엄마도 맞벌이 부부로 살았던 터라 분업에 관대하다. 그냥 아들의 젖은 배가 안쓰러운 거다. 어떤 의도도 의미도 담지 않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말을 아내가 들었다면 분명 불편했을 것이다.
장모님 말을 듣던 아내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터. 그 말에는 자식 걱정하는 마음 외에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았다고. 나 역시 머릿속 기억 회로들이 바삐 움직여 준 덕에 평점심을 되찾았다. 애써 예민할 필요 없다는 답을 제출하니 마음이 편했다.
결혼해 양가 부모를 보살피는 일은 상식이다. 그들이 아프건 건강하건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부부가 서로 돕는 것도 마땅하다. 굳이 입에 수시로 담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명확하게 해야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당연한 명제는 그저 마음에 담고 가슴으로 느끼며 살면 된다.
엄마는 당신이 아파 자식, 며느리 고생한다고 자책한다. 아들이 주말마다 당신 살림을 돕고, 일요일 밤마다 다림질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장모님은 딸의 고생이 속상하고, 사위의 무심함이 서운하다. 엄마는 몸이 불편한 매형을 보살피는 누나가 짠하고, 시어머니는 그게 고마우면서도 깔끔하지 않은 누나가 못 마땅하다. 자식 앞에서 일관성이 무너지는 사람이 바로 부모다. 이 모든 상황은 돌고 돌아 결국 한마디로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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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는 잠재적 내리사랑 보균자다. 가끔씩 가슴을 툭툭 치는 일이 벌어지면 사랑균을 옮길 뿐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위를, 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 덕에 가족의 순환 톱니바퀴가 균형을 이룬다. 다만 내 자식에 대한 마음이 조금 더 애틋할 뿐이다.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우스는 '부모의 사랑은 내려갈 뿐이고 올라오는 법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인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모든 부모가 잠재적 내리사랑 보균자다. 가끔씩 가슴을 툭툭 치는 일이 벌어지면 사랑균을 옮길 뿐이다.
이로써 사람은 경험으로 배우고 이해하고, 아픔으로 성숙해진다는 진리 하나를 건졌다. 세상에 정답이 하나인 일은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실감한다. 이를 가슴으로 깨닫는 다면 가족 간 다툼도 오해도 상처도 줄어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