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만 두고 주말마다 아이들과 엄마네 집에 간다. 항암 치료로 기운 없는 엄마를 위한 위문 공연이자,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게임도 하고, TV를 보면서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 자격증 시험을 앞둔 아내 공부를 위한 배려 이기도 하다. 외출이 힘든 코로나19 시대, 나름 가족개개인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엄마가 다음 주부터 안 와도 된다고 했다. 이유가 기막혔다. 아니 웃겼다.
"XX아들이 엄마한테 너무잘해서 이혼당했데."
"누가 그래?"
"YY 아줌마가 그러더라."
"풉, 아줌마 질투하나 보다."
'엄마가 아줌마한테 내가 잘한다고 허세 부렸나?'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까지 내게 전화해 '엄마한테 잘해라' 노래를 하시던 분이다. 엄마한테는 자기 아들 흉을 보며 수시로 '네 아들이 부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짠했다. 당신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아픈 후부터 자식들 눈치 살피는 엄마에게 굳이 전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엄마의 병이 가볍지 않은 만큼 가족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 하나 먼저 지치지 않게 분업으로 벨런스를 유지한다. 효자, 효녀, 효부라서가 아니라 자식이니당연한 일이다. 물론 마음처럼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마음만으로 따를 수 없는 개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런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단언한다. 부모에게 못하면 불효자라고 내 일처럼 흉을 보고 혀를 찬다.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라고. 잘하면 폭풍 칭찬을 하며 기특해한다. '요즘 저런 자식 없다'라고.
엄마 친구처럼 이상한 쪽으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며느리나 딸이 하는 건 당연, 아들은 좀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 작년 엄마가 고관절 수술을 해 입원했을 때 나는 병실 청일점이었다. 저런 아들이 없다며 졸지에 천하의 효자가 된 적 있다. 한 병실 세명의 딸과 똑같은 일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불필요한 아주머니 관심은 친구 아들의 기특함을 넘어 이혼 걱정에까지 다다랐다. 엄마의 가장 오랜 벗이자, 엄마 병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엄마가 병에 걸렸을 때 가장 슬퍼하고 애통해했던 친구다. 누나나 며느리가 엄마를 살뜰히 챙기는 건 관심 밖 일이다. 아줌마 관심사는 오로지 아들이다. 엄마가 기운을 좀 차리고 잘 지내는 거 같으니 대화의 주제가 친구 아들로 넘어갔다.
그래, 수시로 가족도 잘 챙기라는 아줌마의 속 깊은 말이겠지.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할까?'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아줌마가 야속했다. 그 말을신경 쓰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가끔 상상 초월하는 말로 상대에게 기막힘을 선사하는 이들이 있다. 부부가 이혼한 이유는 분명 '남편이 효자라서'가 아닐 것이다. 서로 남모르게 쌓인 감정의 골이 그쪽을 향해 터졌을 터. 내막은 둘 만 아는 비밀이다.
엄마 병을 발견한 지난 4월 말부터 지금까지 온 식구가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누구를 원망할 겨를 따윈 없다. 바쁜 일상이 계속된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잘해야 상대도 내 부모에게 잘한다는 진리를. 묵묵히 그저 서로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강요나 비난은 부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지름길이다. 경험으로 배웠기에 뼈에 새겼다.
'그래, 수시로 가족도 잘 챙기라는 아줌마의 속 깊은 말이겠지' 아줌마의 검은 속삭임 덕에 아내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가족의 마음을 한 번 더 헤아려 본다. 시어머니 병시중하면서 힘들 텐데, 내색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매주 엄마 집을 찾는 걸 아내가 서운해하지는 않았을지.
아내한테 슬쩍 얘기했다.
"어우, 그 아줌마 왜 그래? 다음 주부터 안 가는 거 아.. 아니지?"
힘든 와중에는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를 무작정 챙기는 것도 무관심만큼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아내도 나도 서로 숨 쉴 틈을 알아서 만들고 있다. 가끔은 깊은 숨을 마음껏 몰아쉴 수 있는 시공간을 내주는 게 가족을 위한 배려이자 센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