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오랜 메일함을 정리했다. 보낸 메일함에서 13년 전 한 신문사에 기고했던 글을 찾았다. 보낸 날짜는 2008년 9월 17일. 운 좋게 채택돼 문화상품권을 받았던 추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랐다.
2008.09.17
오랜 친구와의 전화통화 중 기억에서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옛 친구 이름이 등장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친구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친구와 내가 오래전 쌓아 올린 추억이라는 소중한 선물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추억이라는 단어의 뜻에 긍정적인 의미는 없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추억이란 단어는 긍정의 기운을 휘몰고 온다. 안 좋았던 기억도 추억이라는 이름하에 모습을 탈바꿈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았든 그렇지 않았든 나중에 와서는 말 그대로 과거의 지난 일이 된다. 나에게 그 과거는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 만든 추억으로 얽힌 순간이다. 건조한 어감의 회상과는 다르다. 추억으로 포장된 순간은 지난날의 티끌 같았던 감정까지 그대로 전달한다.
현재 교류가 잦은 사람들과는 미래에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추억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먼 훗날 희미해진 그들을 떠올릴 때, 편안함과 넉넉함이 녹아든다면 과거는 비로소 선명한 추억으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편안함과 넉넉함은 중요한 요소다. 더불어 꼭 필요한 양념 하나를 더한다면 설렘 아닐까. 추억과 설렘은 늘 공존한다. 오랫동안 잊었던 사람과의 상상 속 재회에서 느끼는 설렘. 이러한 설렘은 서로가 공유한 추억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만남의 순간을 따스하게 물들인다.
시나브로 잊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소중한 인연을 맺을 당시 우리는 서로 희미한 사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또한 하루하루 깨닫는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참 피곤한 요즘이다. 사회에서 맺은 이해타산적인 관계 속에서 모든 걸 드러낼 수 있는 솔직한 만남이 점점 줄어든다. 안타깝다.
동심을 잃고 차가운 세상을 배워 가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슴으로 맺은 사람들과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분명 추억과 설렘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때문에 그들을 생각하며 추억에 설레는 것이다.
서른 줄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30대의 인생일 뿐이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을 거쳤다. 나를 기억하건 그렇지 않건 천연天緣으로 만난 사람들이다. 나 역시 모두를 기억할 수 없다. 다신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억 인구 중 평생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었다고 볼 때, 누구를 만났던 천명天命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짧았더라도 소중한 만남이었음은 분명하다.
각박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냉정한 이웃에 실망하고, 비정상적인 사회를 바라보며 냉소적인 시선이 늘어만 간다. 이럴 때일수록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좁아진 가슴은 조금 더 활짝 열어 두어야 메마르지 않는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모여 이룬 세상이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아팠다면 다시 사람에게 치유받으면 그만이다. 이 모든 과정이 나중에 다시 꺼낼 추억을 쟁여두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현재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지금껏 나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 그들과 남긴 정겨운 추억과 설렘이야말로 늦겨울 철 모르고 피어나는 개나리처럼 우리 마음에 희망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단순한 과거를 능가하는 추억은 오랜 시간의 침묵을 한순간에 부숴버릴 만큼 강력한 설렘 에너지를 선사한다.
오늘 하루,
기억 저편에 잠든 나의 누군가를 찾아 설렘 가득한 추억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중언부언하는 글을 읽으며 13년 전 나를 돌아봤다. 순수했다. 정이 넘쳤다.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내 곁으로 흘러온 모든 이를 따듯하게 맞았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후 내가 쓰는 글에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남을 사람은 곁에 남는다는 냉소적인 시선이 듬뿍 담겼다.
시대가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제는 추억이 아닌 부시시 잊힐 기억으로 여기고 싶은 일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거의 내가 읊었던 좋은 사람과의 추억과 설렘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두근두근 설렘을 선사했던 누군가와의 추억 한 조각을 되새김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