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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Nov 17. 2021

22시간의 고문으로 깨달은 잡념

'실천하지 않는 흔하고 흔한 상식'


코로나19로 미루고 미뤘던 건강 검진을 받았다. 내시경뿐만 아니라 추가 비용까지 지불하며 여러 검사를 진행. 위와 대장 내시경 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식단 조절과  금식을 경험했을 것이다. 2~3일 전부터 검사 준비에 돌입했다. 이십 대부터 2년마다 꾸준히 검사를 받아 왔기에 익숙한 일이었다.


 전날 아이들과 남산에 올랐다. 오후 두 시경 그날의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 병원에서 죽을 먹으라고 했지만,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 돈가스와 피자를 먹었다. 허겁지겁. 남산에서 저녁까지 긴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탈탈 털고 탈진 직전 집에 돌아왔다. 바로 약을 마시고 위와 장을 열심히 비웠다.


3일 정도 밍밍한 음식을 먹고 고작 22시간 금식. 잠깐이지만 지독한 고문이었다.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맥없이 늘어졌다. 하늘이 빙빙 돌았다. 검사가 끝나면 초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짜파게티가 당겼다. 두 개를 끓여 배를 꽉꽉 채웠다. 평소 식탐 따위는 없지만, 그날은 몽쉘통통, 약과, 아이스림 등 눈에 보이는 걸 다 쑤셔 넣으며 뱃속의 허전함을 1도 남기지 않았다. 기가 싸악 가시고 뇌에까지 여유가 생기니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다. 내 짧은 고문의 시간수개월 엄마가 당한 고문의 순간. 아들이 가한 고문이랄까.


아직 집에는 녹즙기, 야채 가루, 차가버섯 분말, 올리브 오일, 구충제 등이 남아있다. 희망이라는, 기적이라는 명목 하에 엄마를 괴롭히던 물질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소주컵에 올리브 오일 2/3를 담아 엄마에게 내밀었다. 녹즙을 마시고, 버섯과 야채 가루를 타서 또 마시고, 녹즙, 버섯물, 야채 가루... 하루 식단을 출력해 엄마에게 들이밀기도 했다. 엄마는 이 맛없는 것들을 쓴웃음과 함께 꾸역꾸역 마셨다. 친구에게는 '아들이 나 하루라도 더 살라고 노력하는데 마셔야지'라고 했고, 며느리한테는 '너무 맛이 없어 먹기 싫다'라고 했다. 누나에게는 '저런 거 마시면 아무 입맛도 없다'라고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엄마가 먹던 맛없는 것들을 내가 조금씩 조금씩 비우고 있다. 엄마를 떠나보낸 어느 날 아침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는 올리브 오일을 빈속에 들이켰다. 반나절 동안 뱃속이 떠들썩해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엄마 보란 듯 함께 마셨던 녹즙은 쓰디썼고, 걸쭉하고 새카만 버섯물은 사약 같았다. 금식보다 더한 괴로움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짙은 아쉬움은 남을 뿐이다. 남은 시간 동안 엄마가 생전 접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면 더 좋았을걸. 의사 말대로 드시고 싶은 거 다 드시게 해 드렸다면 아쉬움이 덜했을까.




검진 결과는 대부분 정상이었다. 다만 당뇨 관련 항목들이 정상 범주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의사는 공복혈당도 정상이고 괜찮다며 (누구나 조언할 수 있는) 금주, 금연, 운동 세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건강에 신경 써야 될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잠깐 뛰었던 아침, 심장이 터질듯을 느꼈던 순간이 떠올랐다. 운동, 음식, 건강을 살포시 가슴과 머리에 새겼다.


며칠 후 친구를 만났다. 내 이런 넋두리에 아버지의 당뇨 투병 이야기를 들려줬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보다 무서운 병이었다. "이 정도면 이제 건강 좀 신경 쓰겠지?"라는 말로 걱정을 대신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 흔하고 흔한 상식이다. 그렇지만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최근 읽은 책 <식탁은, 에피쿠로스처럼>에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라는 촌철살인의 문구가 눈에 콕 박혔다. 혈액 속 포도당이 점점 높아지거나, 살찌고 배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원망할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는 말이다. 불혹을 진작에 넘겼음에도 피자, 떡볶이, 치킨, 아이스크림, 군것질이 일상화된 하루를 곱씹어 본다. 운동이라곤 걷기 밖에 안 하는 스스로를 째려본다. 운동이든 음식이든 금연, 금주든 더 늦기 전에 조금씩이라도 건강을 챙기는 일, 미래지향적인, 지속 가능한 삶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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