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무관심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관심을만끽하는이도있고. SNS에빠지는것도관심에관심을기울이는일이고, 글쓰기도관심을바라는일이다. 고르고골라올린사진을많은사람이보고자신이 원하는댓글이 남길원한다. 정성들여쓴글을한사람이라도더읽었으면하는바람, 당연하다.이는욕심이아니다. 그런데이런소소한마음을 '관종'과연결 짓기도 한다.
"관종이냐?"
브런치 글 발행 때마다 친구들 단톡방에 공유했다가 들은 말이다. 내 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일 뿐이었다. 농담이라지만 기분 별로였다. 어떤 형태든 사람은 누구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성장했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흔하디 흔한 '관종'이라는 표현은 아무에게나 떡 붙이는 말이 아니다.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충족하며 살기도 한다.
'이런게바로관종이지' 싶은영화를한편봤다. 제목은 <프록시>. 시작부터꽤충격이다. 9개월된임산부배를벽돌로무자비하게가격하는신. 영화는반전을거듭하며쉴새없이당황스러움을연출한다. 잔혹, 경악,사이코패스라는키워드만으로도설명가능한영화의뿌리는관심병이다.
벽돌 공격으로 아이를 잃은 주인공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괴로움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별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해 음주운전자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은 A를 만난다. 비슷한 아픔을 간직한 이들은 금세 친해진다. 그런데 친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A는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A의 거짓 연기에 속았음을 눈치챈 주인공은 복수를 결심한다. A의 환상을 실현해 주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
사실 주인공은 애초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었다. 임산부에게 건네는 사람들의 배려와 관심을 즐겼을 뿐이다. 그래서 출산을 앞두고 동성 애인에게 아이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사별한 사람들 모임에서 만난 여자 역시 불쌍한 미망인 행세로 집중되는 시선을 즐겼다.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더 큰 관심을 원했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충족하며 자신의 행복을 증폭했다.
잔인한 소재로 짙은 메시지를 남긴 건 조금이라도 더 기억되기 위함 아닐까?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다.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다. 고독인지 외로움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외로움은 나 자신을 잃어갈 때 더욱 또렷하게 각인된다. 각박한 세상에 살며 나 자신을 수시로 내팽겨 친다. 매일이 전쟁인 일상에서 '내가 누구였더라'라는 의문조차 품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젖곤 한다. 가끔씩고개 들어거친 숨을 몰아 쉴 때 밀려드는 게 바로 외로움의 모습 아닐까.
타인에게 관심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하지만원하는 만큼 충족하지 못하면 외롭기 그지없다. 정도가 지나치면 병이 된다. 관심병자. 경계성 인간(경계성 인격 장애자)으로 불리기도 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너 관종이냐?"라는 말을 그저 우스겟 소리로 여기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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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에 목마른 이들이 벌인 사건이다. 이처럼 도가 지나치면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사를 비롯해 영화 <프록시>의 엽기적인 내용은 현대인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는 과장됐지만 관심에 목마른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함을 부인할 수 없다. 관심받고 싶어서 질병을 꾸미는 것을 뮌하우젠 증후군이라고 한다. 관심에 목말라 거짓말을 하는 걸 공상허언증이라고 부른다. 결코 남 일이 아니다.
영화가 잔인한 소재로 짙은메시지를남긴건조금이라도더오래기억하라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당신이외롭고힘든만큼모두가힘들고외롭다는외침이다. 작은관심이거대한나비효과가될지도모른다는힌트일지도. 돌이켜 보니 영화는미치광이들의정신나간향연만이아니었다. 현대인의외로움을각인하기위해만든끈끈한위로이고조언이었다.
각박한 세상, 나 하나 사는 것도 힘든데 타인에게 관심을 선사할 여유 따위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타인의 사소한 관심이 생활의 활력이 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 준다는 걸 느껴봤을 것이다. 가끔은 삶이 힘든 서로에게 틈틈이 소소한 관심 한 줌 건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