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병원에 머물 때 매일 날아들었던 톡이다. 아픈 엄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가 여러 명 있다. 엄마가 고관절 골절 수술을 했을 때도, 폐암 진단을 받고 돌아가실 때 까지도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자식들처럼 아파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단톡방 속에서 따듯한 마음을 전해준 친구들이다.
매일 팔딱거리는 단톡방에는 8명의 친구가 담겨있다. 유부남, 유부녀가 돼 다시 모인 사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동창, 여사친, 여사친의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등 오색빛깔 인간들이다. 자칫 오합지졸 같지만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보다 오래된 사이에서 배어나는 끈적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십 년간 쌓인 추억과 이야기보따리는 매일 쏟아내도 끝이 없다. 가끔먼지 쌓인 앨범을 풀어 낡디 낡은 사진을 톡방에 전시한다. 함께 보낸 그때 그 찬란하던 시절의 추억과 망연한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어 뭉클하다.
남녀가 오랜 시간 친구 사이로 남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현실의 부인이, 남편이 싫어한다. 우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연락도 뜸해졌다. 주변 친구의 결혼식, 자식들 돌잔치 때나 만나 반갑게 인사할 뿐이었다.
다시 모여 단톡방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있다. 6년 전 친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젊은 시절을 정신없이 보낸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일은 이제 부모님 장례식일 가능성이 높다. 부고를 알리는 단톡방이 생겼다. 시간을 정해 장례식장에 모였다. 오랜만에 친구라는 순수한 이름으로 마주한 자리였다. 친구 아버지가 다시 모이게 해 준 덕분에 다시 대동 단결했다.
"남녀 간의 우정은 결혼 후에도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교양 있는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에 적힌 글이다. 세월이라는 풍파를 보내는 와중에 부부의 마음은 깊고도 넓어졌고, 피천득이 말한 교양과 아량도 부지불식간에 생겨 버렸다. 교양과 아량이 아니더라도 우정이라는 단어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덕분에 6년째 단톡방은 사라지지 않고 펄떡이는 중이다. 진화도 거듭했다. 어릴 때처럼 회비도 걷고 생일을 챙기고 모임도 한다. 톡방의 가장 큰 특징은 주제가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더더욱 없고 잡다하기 그지없다. 늘 엉망진창, 칭찬은 메말랐고 비웃음이 넘치며 자기 할 말만 하기 딱 좋은 방이다. 성형 수술 직후 사진도 대놓고 올리는 그런 곳. 그 사진을 간직했다가 잊을만하면 다시 남발하는 무법지대다. 그래서 더더욱 정겹다.
이 방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식이나 부모님이 아플 때, 엄마, 아빠로 가정에서 힘들 때, 직장에서 고달픈 일이 있을 때 서로 힘이 되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일에는 함께 욕을 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발 벗고 나서 조언을 한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기에, 고만고만한 삶을 살기에 서로를 이해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딸내미랑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수학 문제도 단톡방에 던지면 풀이 과정이 올라온다. "아빠 이런 친구들도 있어요?"라며 딸내미가 놀란적도 있다. 예외도 있다. 차마 공감할 수 없는 얘기에는 막말과 구박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기 더없이 좋은 대나무 숲이다.
엄마가 아플 때마다 친구들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실시간 엄마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마음 써주는 친구들이 큰 힘이 됐다. 가슴에 걸린 무언가를 털어놓을 곳이 없을 때 고해성사하듯 툭툭 던졌다. 나이 들수록 마음 털어놓을 곳이 점점 줄어든다. 가장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타이틀 때문에, 어른이라는 까닭에 엄살을 피해야 하는 세상이다. 다 그렇게 사는데 혼자 호들갑 떠는 모습으로 비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인생, 모두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오랜 친구가 주는 축복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일 때 바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미국 시인의 말이다. 가족도 직장 동료도 누군가의 선후배도 아닌 친구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일 아닐까. 각박한 세상에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 아무리 창피하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내 편이다.
우정을 끝낼 수 있다면 그 우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를 품고 살아간다.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하지 못할 내밀 하거나 싱거운 이야기도 있다. 그럴 때 친구라는 이름이 지지하는 든든함을 기억한다. 아무리 바보 같아도 이해할 수 있는 친구. '우정을 끝낼 수 있다면 그 우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정의 존재는 곧 우리의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도 카톡방에는 쓸데없는 얘기가 난무했다. 산소통 같은 친구들이 여전히 곁에 머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젊을 때는 함께 노느라 몸이 즐거웠지만, 지금은 마음이 정겹다. 감사한다. 서로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음에. 무거운 마음도 기꺼이 쪼개 나눌 수 있음에 땡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