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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Feb 23. 2023

90년대 가요 듣고 깨달은 아빠의 복잡한 심경

'어려울 때일수록 가정이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평범한 말'


출근길 우연히 한스밴드의 노래 <오락실>을 들었다. 한스밴드는 1998년 9월 23일 데뷔했다. 세 자매로 구성 그룹으로 멤버들 당시 중1, 중2, 중3이어서 더욱 화제였다. 데뷔곡은 첫사랑 이야기 담은 <선생님 사랑해요>였고, <오락실>도 같은 앨범에 들어있는 곡으로 꽤 유명했다.


워낙 인기를 끌던 그룹의 노래라 거리에서 카페에서 여기저기서 많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들으며 노래방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경쾌한 리듬에 맞춰 몸만 들썩였지 가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남의 장소였던 오락실에서 DDR이나 할 때였다. 아빠의 마음을 털끝만큼도 헤어리지 못하던 그때.


오늘 아침, 현재진행형 아빠인 내 마음 이미 먼 곳으로 떠나신 내 아버지 마음 테더링 된 기분을 느꼈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복사해 동갑내기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이 노래가 이렇게 애처로운 노래였어?"


잠시 뒤,


"이거 뭐 이렇게 팍팍 와닿냐?"


어느덧 부모가 돼 지독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 답변이 이어졌다.


가사를 본 누나도 "아빠 되고 나서 보니 느낌이 다르지?"라는 말로 맨날 싸우던 동생이 벌써 두 아이의 아빠라는 놀라운 세월의 흐름에 동조했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까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엔 신나게 코 골며 잠꼬대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 꺼 내 거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오 너무너무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 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가사에 나오는 엄마 모습과 지금 엄마들은 많이 다르지만, 그때의 아빠와 현재의 아빠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새벽녘 집을 나서고 무거운 발걸음에 무거운 어깨까지 추가해 집으로 돌아온다. 노래 가사에서 딸은 아빠가 회사에 가기 싫어 오락실에 자주 간다고 표현했다. 이는 누가 봐도 실직이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의 날(IMF)을 맞았다. 그 여파는 대기업을 시작으로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2001년 8월 IMF 사태가 공식 종료되었지만, 경기침체 속 온 국민이 망연자실했다.


"요즘 직장을 잃거나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정이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평범한 말이 그래서 더욱 절실합니다." 


1998년 2월 27일 MBC 뉴스데스크 멘트의 일부다. 한스밴드의 노래 <오락실>이 경쾌한 멜로디의 탈을 쓴 역설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시대 상황을 가벼운 리듬과 쉬운 가사로 보여준 노래였는데, 흥겹게만 들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아픈 현실을 반영한 슬픈 노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1997년 IMF 시절, 철딱서니 없던 아들은 넉넉한 카드고지서와 시티폰 요금 잔뜩 남기고 군대에 갔다. 온 가족이 없이 살던 시기였지만, 막내아들은 삶에 아무런 지장 없이 살았다. 그 감당은 오롯이 부모님 몫이었다. 빠는 왜 힘들다는 말을 한번도 안 했을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세월이 돌고 돌아 아빠의 자리에서 예전 아버지가 느끼던 가장의 무게를 체감하고 있다. 견딜 수 있는 이유, 하나밖에 없다. 1998년 뉴스에서 앵커가 말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내 아빠에게 따듯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정이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평범한 말이 그래서 더욱 절실합니다"라는 앵커의 표현이 슬프기만 하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중 3이 된 딸내미는 노래 가사처럼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중1 아들은 엄청 잘함. AI 느낌)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아직도 자주 곁에 머문다. 매일 밤 방으로 찾아와 (피곤한데 잠도 못 자게) 수다 떠는 남매 덕분에 무거운 발걸음과 어깨의 짐은 매일 리셋이 된다.


좁아터진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중1 아들과의 불편한 동침에 다음날 몸이 찌뿌둥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얼마 안 남았다는, 복인 줄 알라는 주변의 조언에 행복하게 즐기는 중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힐링이자 기쁨, 그리고 행복이다.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라고 이제라도 내 아빠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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