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후배를 만났다. 안부를 묻고 짧은 잡담을 나눴다. 본론을 들을 차례였다. 후배가 머뭇거렸다.
"혹시 회사 그만둬?"
"아... 아니에요."
머뭇거리던 후배는 멋쩍게 웃으며 자기도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출간 경험 있는 내 조언이 필요하다고.
사실 이 후배와는 아무 접점이 없었다. 내가 3년간 다른 계열사로 파견 갔을 때 입사한 후배다. 서로 다른 층에 근무했고부문도 달라 서로 모르던 사이였다. 화장실에서 한 두 번 마주쳤으려나. 후배와 인연을 맺은 건첫 책 출간 이후다.
어느 날 후배가 불쑥 내 자리로 찾아왔다. 난데없이 내 책을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당황스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날 이후 후배와함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눈을 반짝이며 책을 쓰고 싶다는 후배 모습에 놀랐다.기분 좋게 반가웠다. 내 마음의 아쉬움과 공허한 허기를 후배가 용케 알고 파고들었다.
블로그로 시작해 브런치스토리에 터를 잡고 14년 동안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의 효능을 잘 알기에, 이런 내 경험을 주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글쓰기 전파를 위해 부단히 애썼음에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내 14년 글쓰기 경험에 의하면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바로 아무나다. 또 꾸준히 쓰기만 한다면 책도 낼 수있다. 내가 바로 14년간 꾸준히 쓴 증인이다.
나의 하루, 자신의 삶 자체가 유일무이한 글감이다. 누구나 소중한 글감을 품고 살아간다. 그 원석을 활자로 잘 갈고닦으면 된다.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저 남 일이고 어려운 일이라고만 여긴다.
"책 낼 때 돈이 드나요?"
씩씩하게 원색적인 질문을 하는 후배가 귀여웠다. 많이 들은 말이라 십분 이해했다. 차근차근 출간의 3가지 방법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기획 및 반기획 출판, 자비 출판, 주문형 출판(POD)에 관해.
이어 말했다.
"쓰고 싶은 분야 책 많이 읽고, 책 쓰겠다는 마음보다 꾸준히 글 쓰겠다는 마음으로 해봐."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후배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별 알맹이 없는 내 얘기를 메모장에 진지하게 받아 적었다.
연신 달뜬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상기된 얼굴로 내 덕에 실마리가 잡히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좋아했다.
내 경험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어 뿌듯했다. 후배의 열정과 의지가 느껴져 기뻤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메신저가 깜빡였다.
"선배님 저 두근두근 너무너무 설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부럽다..."
나도 모르게 '부럽다'라고 말했다. 후배는 "선배님도 설레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다. 가슴속 저 멀리 밀려있던 기억 상자가 열렸다. 후배 저리 가라 할 만큼 흥분과 설렘에 휩싸여 글을 썼던 그때. 부지불식간에 잊힌 그 순간. '아! 나도 그랬지...' 불현듯 떠올랐다.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설렘이 가득 차 넘칠 때가 있다. 이때가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척박한 삶, 무미건조한 나의 일상이 글을 쓰고 책을 쓸 때 빛났다. 책이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더욱 소중하게 빛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어두운 삶을 비추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
첫 책 출간 제의를 받았을 때의 설렘과 떨림 그리고 흥분했던 순간으로 잠시 돌아갔다. 수개월 간 평일 저녁과 주말을 통째로 반납하면서도 행복했던 기억을 후배 덕에 되찾았다. 직장생활이 힘들 때 글 쓰기로 위안을 받았던 순간,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글로 하소연하고 소통으로 위로받았던 순간, 글이 내어주던 위로와 여유가 떠올랐다. 몸과 마음이 여유로울 때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여유를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후배는 한술 더 떠 프롤로그에 "책을 쓰는데 큰 도움을 준 장한이 선배님께 감사한다"라고 쓰겠다고 했다. 잘 부탁한다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퇴근길, 후배와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찬란했던 그 설렘을 다시 꺼내 간직했다. 고갈되지 않을 것 같았던 강렬했던 에너지. 미친 듯이 바쁜 와중에 느꼈던 여유로운 기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설레었던 순간을 반추하며 메모장을 열어 이 글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