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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ul 16. 2023

남편 외조로 2,646등에서 1등한 아내

남편 등골 빠지게 한 아내의 블로그 사랑 이야기입니다


2010년에 개설한 블로그에 글을 쓰지는 않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살아 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과거의 내가 여전히 활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소환해 주니 놀랍다. 기록의 힘이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거의 한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어서다.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남기는 이유 중 하나는 수년 뒤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다.


중고교 시절 시험이 끝나면 교실 맨 뒤에 등수를 붙여 놓았다. 과거 다음 티스토리는 매일 개인 블로그의 순위를 공개했다. 요즘에는 사라진 진귀한 풍경이지만, 기록하는 습관 덕분에 과거의 기록에서 명장면을 건졌다.


더불어 집 안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면 목례? 정도 하는 사이가 된 아내와 이렇게 알콩달콩 지냈던 때가 있었다니 놀라우면서도 그립다.




첫째가 태어난 지 1년 반 되던 때였다. 아내는 육아 때문에 복직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걱정됐다.


마음이 쓰였던 남편은 훗날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한마디를 던졌다.


"집에서 심심하면 블로그나 해봐. 육아 쪽으로 하면 되겠네. 애 잘 보잖아."


(기록에 의하면 나는 아내에게 '심심하면 블로그나 해'라고 했다.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이런 표현을 썼다니 아주 놀랍다)


'블로그는 물건 살 때 후기 검색용 아닌가?'라고 생각하던 아내가 티스토리라는 블로그를 알아냈다. 어디선가 초대장을 받아 2009년 7월 8일 블로그를 아주 어렵게 개설했다.


"오빠 HTML이 뭐야? 구글 애드센스 어떻게 설치해?"


시도 때도 없이 SOS를 보냈다. 남편은 외면했다. 그도 몰랐으니까. 아내는 다른 블로그 글을 열심히 찾아 배우며 홀로 서기를 했다. 하나 둘 잡동사니 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9년 8월 15일 등골 빠지는 서막이 열렸다.


"블로그 하려면 개인 디지털카메라가 필요하겠더라고!"


남편 디지털카메라가 있었지만, 항상 가지고 다녔기에 저렴한 20만원대의 캐논 파워샷 E1을 3개월로 사줬다. 약 보름 정도 사용하고 제주도 바닷물에 퐁당 빠뜨리며 작별했다. 할부를 아직 1개월도 안 냈기에 아내는 남편 카메라를 빌려 포스팅을 이어갔다.


남편은 속으로 '제대로 하지도 않는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장비에 집착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13개월이 지났지만, 블로그 순위가 2,646등이었기 때문이다. 폐업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블로그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오빠도 같이 블로그 하면 좋겠어. 취미생활 같이 하면 좋잖아"라며 남편을 블로그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돌이켜 보면 '너는 얼마나 잘하는지! 어디 한 번 해봐?'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선의의 경쟁자가 탄생했다.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블로그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초반에 잠깐 헤매던 남편은 영화 리뷰 포스팅을 시작으로 금세 분위기 반전시켰다. 아내의 2,646등이 무색하게 초반부터 치고 올라왔다.


남편의 선방에 놀란 아내도 속도를 높였다. 둘째 임신으로 만삭이었음에도 남편을 따라잡기 위해 출산 당일까지 블로그를 놓지 않았다. 덕분에 아내의 순위가 꽤 많이 올랐다.


둘째를 낳고 블로그에 복귀한 아내. 둘째라는 새로운 육아 블로그 주인공의 등장에 기세가 등등했다. 아내는 그 당당한 기세를 몰아 카메라를 요구했다.


"카메라가 너무 별로라서 블로그 하기 힘드네."


남편은 카메라를 사는 족족 망가뜨렸다. 남편 친구가 버리기 직전의 카메라를 줘서 쓰고 있던 때였다. 아내는 둘째를 빌미로 기세를 꺾지 않았다.


"애들 자랄 때 사진도 많이 찍어야 하는데… 카메라만 좋으면 블로그 순위도 더 금방 오를 거 같고… 정말 행복할 텐데..."


행복은 카메라 순이 아니거늘. 지금 같았으면 '응 아니야'하고 넘어갔을 텐데, 토끼 같은 아이들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몇 날 며칠 아내에게 시달리던 남편은 두 손 양 발 다 들고 2010년 11월 3일 카메라를 질렀다. 무려 100만원짜리 카메라. 10개월 무이자. (요즘에는 무이자가 3개월 밖에 안 돼서 몹시 씁쓸)  


카메라를 받아 들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내를 보니 맘이 편하고 또 짠했다.


'이제 시달림에서 해방이야!'


착각이었다. 아내는 가죽 케이스도 필요하고, 렌즈도 필요하다며 은근 스리슬쩍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집에서도 55mm 렌즈를 끼고 아이들과 온갖 사물을 찍어댔다. 둘째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파트 단지를 활보하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기운에 힘입어 블로그에 열과 성을 다하던 아내는 2,646위에서 금세 100등대로 뛰어올랐고, 둘째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33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자극받은 남편도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쉬지 않고 글을 쓰며 아내를 추격했다. 아내는 초조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고요한 밤이었다. 아내는 다시 폭탄 발언을 했다. 둘째가 잠을 안 자서 컴퓨터를 하기 힘들다고. 블로그 이웃들 댓글 달기도, 답방 가기도 어렵다는 슬픈 푸념. 아기 띠를 매고 컴퓨터 방에 가서 블로그를 해야 한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둘째 잘 때 옆에서 편하게 포스팅할 수 있게 '노트북이 껌딱지처럼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었다. 안방 입구에서 세 발만 움직이면 컴퓨터 방인데? 카메라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 노트북은 낭비라고 여겼다.  


'첫째도 낮에는 어린이 집 가는데 얼마나 편하게 블로그를 하려고? 누워서 하게?'라고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며칠 동안 아내는 힘이 없어 보였다. 주말에 남편이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주위를 맴돌았다. 블로그에 몇 명이 왔는지, 댓글이 달렸는지 확인하고 글 쓰고 싶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주말에 블로그를 정비하고 여러 개의 글을 쓰기 때문에 컴퓨터를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남편은 주변을 맴도는 아내 때문에 불편했고, 아내는 컴퓨터를 차지한 남편 때문에 불편했다.


2011년 1월 12일이었다. 통화 중 아내는 "둘째가 낮잠을 안 자서 힘들어. 포스팅도 못하고!"라 한탄했다. 남편은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긁었다. 고마운 10개월 무이자 할부로.


며칠 뒤 아내에게 "오빠 짱!"이라는 문자가 왔다. 이 한 마디에 위안받으며 열심히 할부를 동시다발적으로 갚았다. 블로그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이 나간다는 이야기는 왜 아무도 해주지 않았을까.


카메라와 노트북 정기를 받아서인지 아내는 금세 육아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해피엔딩이다. 뿌듯했다. 남편의 외조가 이뤄낸 쾌거다. 그리고 아내는 파워블로거가  '그깟 카메라? 노트북?' 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시절을 보냈다.


하루아침에 원치 않는 경단녀가 된 아내였다. 육아와 살림에 우울해하던 아내가 활기를 찾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아내 덕분에 남편도 블로그를 시작해 또 다른 활력을 되찾았다.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던 남편도 곧 취업직장부문 1위에 올랐다. 우리 부부는 티스토리에서 부부 파워블로거로 꽤 오래 활동을 이어갔다.


아내가 남편에게 블로그를 권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 아내는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의 블로그도 멈춰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 꼬맹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언제 들여다봐도 기분 좋은 과거 세상이다.  


남편은 블로그가 모태가 돼 브런치스토리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그 시간이 무려 14년이다. 기록의 힘을 알기에, 글 속에서 과거의 정겨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기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가끔은 내가 써 놓은 과거의 글을 보며 추억에 빠진다. 똑같은 나인데 다른 내가 보다. 그때의 글은 아주 상큼 발랄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차분해졌다. 과거의 내가 그립기도 하다.


아내와의 경쟁도 순위다툼도 결국은 부부가 오랜 시간 꾸준히 글을 썼기에 가능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즐거움에 빠져 글을 쓰던 아내도 참 대단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즐기는 놈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여전히 글을 쓸 때 나는 즐기는 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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