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덕분에 뼈아픈 과거를 돌아봅니다
어차피 사도 읽지 않을 거 같아 책을 한 권도 고르지 않았다
교회 다녀온 중3 딸이 내 방에 들어와 옷장을 뒤적인다. (사라진 내 옷은 딸내미 방에서 늘 발견된다)
"입을 옷이 없어요…"
징그러운 옷타령. (슬프게도 부전여전父傳女傳입니다) 순간 벌떡 일어나 '딸내미 방에 넘치는 옷들을 다 내다 버릴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무거워 그냥 있었다.
딸아이가 외출하고 방에 가보니 역시 난장판이다. 딸내미 방을 정리하면서 방학 때 읽으라고 사준 책들을 살펴봤다. 몇 주 전부터 읽던 한 권의 책 삼분의 일 지점에 책갈피가 꽂혀있다. 나머지는 새 책이다.
'알라딘에 팔아야 하나? 자기 전에 스마트폰이나 하겠지. 책은 무슨…'
씁쓸한 입맛을 다시다 문득 딸내미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 생신 날 가족이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계산할 때 누나가 보태라며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줬다. 당장 사용할 일이 없어 화장대 유리에 끼워 놓았다.
그날 저녁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아이가 지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 사람 벤자민 플랭클린이네요."
"어떻게 알아?"
"책에서 봤어요."
찾아보니 100달러 지폐 속 인물은 미국의 정치인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러시아 월드컵 경기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리오넬 메시가 뛰고 있었다. 해설가의 입에서 '메시'라는 이름이 자주 튀어나오니 아내가 "메시는 나이도 많을 텐데 아직도 뛰어?"라고 말했다.
"메시요? 키 170cm 정도 되는 축구 선수죠? 어릴 때 성장 호르몬 결핍증에 걸렸는데, 성장 호르몬 주사 맞아서 저만큼이라도 큰 거래요."
딸내미가 갑자기 끼어들어 나도 모르던 일화를 들려줬다. 역시 책에서 봤단다.
한번은 딸내미가 초등학생 때 긴 생머리를 싹둑 자르고 틈만 나면 "이상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응 영구 같아, 근데 영구가 누군지 모르지?"
"심형래요?"
Who?라는 책의 '유재석'편에 심형래가 등장해 알고 있단다. 어린 딸아이와 책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특히 읽은 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는 게 기특했다.
꽈악 붙들어 매고 싶은 아련한 기억이다. 지금은 틈만 나면 친구들을 만나 놀기 바쁘다. 인스타 스토리에 이것저것 올리기 바쁘다. 독서는커녕 인생네컷 사진만 모아도 책 몇 권 분량은 될 것 같다.
책을 끼고 살던 딸이 언제부터 독서와 멀어졌을까.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마냥 원망만 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책과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부전여전父傳女傳입니다) 증거도 확실하다.
"아빠랑 누나랑 서울 교보문고에 갔다. 아빠가 각자 보고 싶은 책 한 권씩 고르라고 했다. 누나는 두 권을 골랐는데, 나는 어차피 사도 보지 않을 거 같아 고르지 않았다."
뼈아픈 과거. 중학생 시절 일기장에 내가 또박또박 적어 놓은 글이다. 어차피 읽지도 않을 책을 고르지 않은 나의 단호함이 아닌, 읽지 않겠다는 아들에게 책을 강요하지 않은 아빠의 현명함이 가슴에 들어와 앉았다.
책을 달고 살았던 엄마, 아빠는 자식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난 왜 아이들이 읽지도 않을 책들을 10만 원도 넘게 들여 장만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가 대신 그 책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빠도 <다행히 괜찮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읽어봐. 재미있어. 사춘기 애들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가방 안에 있던 700페이지가 넘는 책 <세이노의 가르침>을 꺼내고 아내의 추천 도서이자 내가 딸에게 사준 책을 출근 가방에 살포시 넣었다.
'누구라도 읽으면 되지. 나도 중학교 때 책 한자 안 봤는데 뭐… 출퇴근길 가볍게 읽기 아주 좋은 책일 거야'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는 안 하더라고 책을 많이 읽던 친구들은 난이도와 상관없이 언어영역 점수가 높았다. 지문이랑 문제에 답이 다 있다고 했다. (나는 독서를 하지 않아 언어영역을 망쳤을까?)
(아이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좋은 책은 자신의 생각에 자극을 주어, 생각에 또 다른 생각을 입히게 해준다. 독서는 제한적이었던 생각을 풍요롭게 만들어 깨달음을 더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쉽고 가치 있는 자기 계발 방법이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새긴 돌이 있다. 의미심장한 글귀가 참 좋다. '내가 뒤늦게 독서에 발동 걸린 것처럼 아이들도 언젠가는 책을 읽기 시작하겠지?'(이럴 때는 긍정적일 필요가 있지. 부디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길 바란다!)라는 기대를 하며 휴가 후 첫 출근을 해냅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