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드id Nov 03. 2023

"끔찍한데요" 상사와의 대화에서 진심이 튀어나왔다

[직장인 OTT] <잔혹한 인턴>, 퇴사가 고픈 직장인의 속사정


최근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임원과 짧은 면담을 했다. 대화 도중 임원은 내게 앞으로 회사 다닐 날이 15년은 더 남았다며 멀리 보고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정년까지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끔찍한데요..."

"뭐가 끔찍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찾아서 주도적으로 하면 회사 나오는 게 즐거워. 시키는 일만 하면 재미없지."


정말로 회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오시는 분이다. "명언입니다"라는 말로 면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MZ세대가 아닌 X세대인 나에게도 주인의식, 주도적인 업무 추진 등의 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구식의 메아리다.


직장생활 20주년을 불과 몇 년 앞둔 나의 마음에는 '퇴사'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입사 때부터 퇴사를 생각했다. 철없던 시절, 40살부터는 사업하면서 넉넉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망상이었다.


젊은 시절 퇴사는 단순하게 자유와 직결되었지만, 근 20년 회사에 다니다 보니 훨씬 더 그럴듯한 이유가 점점 늘어난. 반면 다녀야 하는 이유는 하나, ‘먹고살아야 하니까’다. 쩝.


남편: 나 회사 관뒀어.

부인: 나 회사 못 다니겠어.

남편: 뭐?

부인: 회사를 관두다니 그게... 당신 미쳤어?

남편: 아니, 지금 출근한 지 일주일이 됐어, 한 달이 됐어? 그게 할 소리야?

부인: 당장 일어나. 가서 사표 물러 달라고 해. 사표 수리되기 전에!

남편: 아, 벌써 끝났어! 아니, 그리고 이틀 되고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근 20년을 한 직장만 다닌 내가 관둔다는데 그걸 이해 못해?

부인: 나는 진짜 사정이 있다고.

남편: 나는 뭐, 사정없는 사람인 줄 알아?


드라마 <잔혹한 인턴>에서 2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둔 공수표(이종혁)과 경단녀에서 다시 인턴으로 출근한 지 이틀 된 고해라(라미란)가 다투는 내용이다. 회사에 20년을 다닌 직장인이나 이틀 다닌 직장인이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모두 절박하다.


나 역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수시로 지배한다. 사회초년생 시절, 회사 생활이 즐거웠던 적도 분명히 있다. 이제는 연차와 재미는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깨달을 뿐이다. 세월이 주는 무게이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도피이기도 하다.


퇴사가 고픈 직장인의 저마다의 속사정


<잔혹한 인턴>의 주인공 고해라는 그토록 바라던 재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주어진 임무에 대한 내면의 갈등과 심리적 부담이 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


현실 속 직장인도 비슷하다. 현실에서는 연차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심리적 부담이 커진다. 요구하는 일은 점점 중요해지고 많아지는데 실력은 생각만큼 늘지 않아 고민할 때도 있다.


오죽하면 한 설문조사에서 능력 있는 실콘벨리 직장인 10명 중 6명이 "내 무능 회사가 알까 두려워"라는 걱정을 할까 싶다. 개개인의 기준이겠지만 많은 이가 엇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업무 진행 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무능함을 실감한다. 그동안 회사에서 속절없이 시간만 흘려보낸 듯한 허탈한 기분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똑똑한 후배들이 속속 등장해 실력을 발휘할 때는 '이제는 알아서 쉬어야 할 때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의 갈등도 퇴사 욕구를 부르는 커다란 문제다. 회사가 아닌 사람을 떠나는 비극이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의 한 팀은 팀장과의 갈등으로 8명의 팀원이 모두 퇴사했다. 한 후배는 팀장과 갈등을 지속하다 무작정 사직서를 냈다. 후배는 자기가 팀장을 버린 것이라고 표현했다. 세계적인 기업 구글을 등지는 사람들도 회사가 아닌 ‘누군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니 말 다 했다.


조직의 갑질을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동창 8명이 모인 단톡방에서 친구가 푸념했다.


“나 팀장 잘렸어. 대 팀제로 조직개편 하면서 다시 팀원 됐다. 쪽팔려서 가족한테 말 못 하고 때려치우고 싶다.”


회사의 방침이라 많은 이가 피해와 극심한 스트레스를 맛봤지만,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거 같은 생각에 하루하루가 불편하다'는 친구 말이 애잔하다.


업무 근로환경에서 받는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떠나고 싶은 이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로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회사를 그만둔 후배도 있고 과도한 업무, 불공정한 대우 등으로 회사를 떠나는 동료도 많았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 '쉼'이 아닐까


"회사 언제까지 다녀야 할까. 지겨워. 우울하다."

"나는 딱! 일 년만 쉬고 싶다."

"나는 15년 다닌 회사 관두고 이직할 때 하루도 못 쉬고 다시 출근했잖아."

"난 25년 동안 육아휴직 6개월이 전부야."

"평생 이러다 죽겠지?"

"나이 먹으니 하루하루가 소중한데, 공기 좋은 곳에서 우리끼리 놀고먹으면서 며칠이라도 푹 쉬면 좋겠다."

"나는 내가 정말 이렇게 살 줄 몰랐다. 엄청 게으른데 매일 새벽 출근... 죽을 때까지 하겠지."


26년 지기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는 농담 따먹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차가운 현실을 논할 때는 급 묵직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직장인에게 가장 큰 불편은 마음대로 쉴 수 없는 현실이다. 휴식뿐만 아니라 집안 경조사, 육아, 은행, 이사, 관공서 업무 등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기 불편하기 짝이 없다.


드라마 <잔혹한 인턴>에서 보여준 부부의 퇴사 논쟁은 현실에서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부부간 속마음 아닐까. 대화 속 남편은 사실 회사에서 잘렸다. 그래서 결국 아내가 회사에 다니고 남편은 공인중개사 자격증 준비를 한다.


공부하는 백수로 지내면서 아이와 부대끼고, 자식 문제로 학교에도 불려 가는 모습이 서글퍼 보여야 하거늘 부러웠다. 평생 한 번 해보지 못한, 앞으로도 못할 것 같은 모습일 테니까.


드라마에서 재취업에 성공한 주인공 고해라보다는 공수표의 백수 생활에 더 마음이 쏠렸다. 20여 년의 지난한 직장생활을 십분 이해할 수 있기에 (회사에서 잘리긴 했지만) 그에게 쉼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알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사는 것은 현대인의 숙명이라지만 잠시 하늘을 올려보며 여유를 찾는 것은 선택이다. 열심히 사는 이들이 번아웃증후군에 맥을 못 추는 것도 어쩌면 잠깐의 ''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호흡곤란을 피하기 위해 직장인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쉬어가는 연습이다. 그래야 고른 숨을 오래 내쉬면서 가장 마지막 단계인 퇴사에 조금이라도 천천히 도달하지 않을까.


"잠깐 회사 일은 쉬는 중인데, 너무 평화롭고... 심심해도 행복해요. 예전엔 일 욕심이 많았는데, 그만 저를 생각해주지 못했구나 싶기도 하고요."


지난번 연재한 글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에 숨겨진 잔혹한 현실>에 달린 댓글이다. 심심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 드라마 <잔혹한 인턴> 속 주인공의 남편이 회사에서 잘린 것은 재도약하기 전 잠시 쉬어가라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당장 잘리지도 않고 당장 관둘 수도 없다면?  알아서 잘 쉬는 연습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외롭고 힘들게 방치했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수시로 챙겨줄 때다.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포트 창립자 헨리 포드의 말을 수시로 곱씹어 보는 건 어떨까.


오늘도 입사보다 어려운 퇴사를 꿈꾸며 이루지 못할 바람을 향해 출근하는 세상의 모든 직장인을 응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