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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May 03. 2024

직장인의 가면은 매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자체발광 오피스>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이 주어진 배역을 수행하기 위해 쓰는 가면을 뜻합니다. 배우는 무대에서 자신의 평소 진짜 모습과는 관계없이 가면을 쓴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을 때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죠.


어찌 보면 직장생활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어떻게든 소화해야 하는 연극과 닮았습니다. 누구나 잘 편집된 영화처럼 화려하고 완벽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언제 실수할지 몰라 늘 불안한 실전의 연극무대와 같죠.


난생처음 맛본 직장이라는 세상은 반복되는 눈치, 야근, 텅장(텅빈 통장), 원치 않는 술자리와 끝없는 긴장감이 전부였습니다. 판타지영화의 주인공을 갈망하던 망상에서 벗어나 척박한 연극무대로 옮겨 생계형 직장인 역할의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의 시간 동안 다양한 페르소나를 지닌 직장인이 되었죠. 또 자식 역할을 비롯해 남편, 부모, 가장 역할 등 다양한 배역까지 맡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작가라는 역할도 추가되었네요.


이 모든 역할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연극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때그때의 맡은 배역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십여 년의 직장생활을 돌아보면 참 여러 명의 나로 살았습니다.


선생님이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빨개지던 내향형 성격이었는데, 지극히 외향형 업무를 맡아 근 이십 년 가까이 이어왔네요. 하지만 내향형이면서 회사에서 댄스동우회 활동을 하고 공연 무대에도 섰습니다. 참 고무적인 순간이었죠. 색다른 나를 만났으니까요. 또 여전히 퇴근 후 지긋하게 앉아서 십수 년째 글 쓰는 제 모습도 보이고요.


제 경험 위주지만, 바로 이런 게 직장인의 삶 아닐까요. 오늘도 물론 영화처럼 화려하고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못했지만, 연극무대 위에서 복잡미묘한 삶의 희로애락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살아갑니다. 절망이 오면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치고, 수시로 밀려오는 시련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톺아보면서 말이에요.


이런 저마다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진짜 나를 찾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내 안에 진짜 나와 가짜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자살한 최이재는 자신의 진짜 삶을 되찾고 싶어 한다_출처: TVING>


"사람은 자기 자신일 때 가장 행복한 법이니까.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면 사는 게 아무 의미 없지 않을까요?"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주인공 최이재(서인국)는 죽음을 하찮게 여겨 자살했다는 이유로 열두 번 다른 사람의 몸으로 부활하는 벌을 받습니다. 위 대사는 여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며 힘겨워하는 주인공에게 전한 말입니다.


짧은 대사지만 저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 번째는 '진짜 나'를 찾는 것에 대한 힌트였습니다. 회사에서 본성을 숨기며 산다는 직장인이 많습니다. 본 모습을 숨기고 사는 게 힘들다는 푸념도 단골 멘트죠.


그래서 한때 '진짜 나로 살아라', '나다움'을 다룬 책이 유행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루 8시간 이상 보내는 회사에서의 내 모습, 과연 진짜 내가 아닐까요? 억지로 회사에 다니는 나, 가짜 나일까요? 회사에서 화난 걸 숨기고 사는 나는 진짜가 아닐까요? 퇴근하면 활짝 웃는 모습이 오직 진짜 모습일까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한 나만 진짜 나일까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말처럼 사람은 자기 자신일 때 가장 행복한 법입니다. 그런데 자꾸 자신을 부정하면 그만큼 행복 지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족이나 가장 친한 사람과 있을 때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내가 취하는 모든 모습은 상황에 따라 판단해 적응하는 훌륭한 인간의 모습이자 능력일 뿐입니다.


한때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짜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했어요. 억지 미소와 웃음을 짓고,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모습. 적성에 맞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너는 딱 직장인 체질이다”라는 당황스러운 말을 듣기도 했어요.


내가 살면서 만난 모두가 바로 나에서 파생된 나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금 모자란다고 부정하며 괴로워할 필요 없습니다. 굳이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모습만 진짜 나라고 한정 지을 필요 있을까요. 내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야 주인공의 말처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면 사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주인공은 재벌 3세,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 형사, 모델 등의 삶을 대신 살았습니다. 열 두 번의 삶을 맞았지만, 어느 삶에서도 만족은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삶이 하찮다고 여겨 자살을 택했던 그 순간의 나를 되찾길 원하죠.


많은 사람이 타인의 삶에 지나친 감정을 이입합니다. 사람에게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몹쓸 습관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위로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멀쩡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나를 태생부터 금수저인 친구와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나의 비교 대상은 바로 과거의 나여야 의미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열 두 명의 삶을 경험하고 결국 초라했던 자기 삶으로 돌아가길 원했듯, 현재의 처지를 비관만 해서는 안 됩니다.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며 부족한 과거를 발판 삼아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지름길 아닐까요.


스스로가 헤쳐 나가며 개척해야 할 오늘보다 소중한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유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페르소나는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등 떠밀려 직장인이 된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은 직장인의 삶을 싫어하지만, 직장인이 되지 못해 고민하던 날이 있지 않았나요? 직장인은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입니다. 자신이 택한 삶 속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펼쳐지고 인간관계도 뒤죽박죽 또 시시각각 처한 상황이 바뀌니 그 역할에 맞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갈 뿐입니다.


회사에서의 내 모습, 남사친, 여사친, 가족,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내 모습이 모두 같을 수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페르소나가 나임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를 살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가치 있는 가면으로 바꿔 쓰며 대응할 뿐입니다.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3개월 계약직 사원 3명의 모습_출처: TVING>


"자기 가치는 자기가 증명하는 겁니다.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세요."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주인공 서우진 부장(하석진)이 3개월 단기 계약직이라는 초라한 페르소나를 쓰고 자신들 가치를 폄하하는 이들에게 전한 따끔한 조언입니다. 직장에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모든 페르소나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저는 대기업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 계약직, 정규직, 팀장 등 모든 페르소나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돌아보니 이 모든 게 제 진짜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직장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느냐가 자신의 가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일 때 가장 행복한 법이니까'라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평소의 내 모습 그대로뿐만 아니라 내가 취사선택한 페르소나도 기특하고 대견하게 여기며 나 자신으로 오롯이 받아들여야 행복해질 기회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직장인의 가면,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아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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