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저와 비슷한 시기에 이직한 후배 중 4명이 이전 회사에 재입사했습니다. 심지어 연봉까지 줄여가면서 말이죠. 흔하지 않은 경우인데, 후배들은 그동안 관계를 잘 다져온 선배들 덕분에 좋은 기회를 다시 잡았다고 말하더라고요.
"사람들도 너무 안 맞고, 일도 너무 많았어요!"
후배들은 잠깐 이직했던 소감을 짧게 정리했습니다. 저 역시 이직한 회사는 15년 다닌 前 회사보다 일이 많고, 재미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순간적인 감정이 아닌 경력 관리를 위한 큰 결심이자 신중한 선택이었습니다. 벌써 4년차를 맞았으며, 새로운 업에 대해 열심히 배우며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인사평가도 잘 받았고, 회사에서 핵심인재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후배들은 힘든 상황에서 일단 도피를 택했고, 저는 신중한 준비를 거쳐 이직을 하였습니다. 후배들의 귀환을 보면서 직장인이 도망치는 곳에 천국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천국은 단순한 상황이 아닌 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이직하느냐에 따라 직장생활이 여전한 시시포스의 형벌일 수도 있고, 새롭게 시작하면서 희열과 설렘을 느끼는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여전히 지옥인데 장소나 주변 사람들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천국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없는 이유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이 동기 장그래에게 조언하는 모습>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질문 같아요? 간단해요. 선택의 순간들을 모아두면 그게 삶이고, 인생이 되는 거예요.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게 바로 삶의 질을 결정 짓는 거 아니겠어요?"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변요한)이 장그래(임시완)에게 전한 말입니다. 모든 경험은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모든 게 낯설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모든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고 삶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충동을 억제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직장인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게 아닐까요.
취업포탈 사이트 사람인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충동적으로 사표 내고 싶은 순간'이 있냐는 설문조사에서 '그렇다'는 응답이 82% 나왔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대로 평가와 보상을 받지 못할 때'(48.8%, 복수응답), '내 잘못도 아닌데 억울하게 혼날 때'(36.2%), '상사, 고객사로부터 갑질이나 폭언을 당했을 때'(31.1%) 등의 순이었습니다. 이 중 31%가 돌발적으로 사표를 낸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 또한 세상을 배우는 과정이겠지만, 선택의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한 번쯤 떠올린다면 수시로 불어 닥치는 마음의 폭풍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회사에 15년 넘게 다니다 이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한 곳에 15년이나 다닌 제게 대단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15년 세월에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숨어 있습니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낼 뻔한적도 있고, 4~5년차 때는 업무 중에 몰래 나가 다른 회사 면접을 본적도 있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직 덕분에 15년을 채울 수 있었던 거죠.
비평가 토머스 카알라일은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저 당장의 직장과 상사에게 벗어나려는 분노만 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제게 득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월급이 적어서’, ‘상사와 동료가 싫어서’, ‘나만 일이 많아서’라는 순간적인 분노로 ‘때려 치워야지!’라는 생각으로 이직을 시도해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회사를 옮기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지금보다 분명 나아질 거야’라는 막연한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준비를 통해 적당한 회사에 합격하면 상황만 약간 달라진 비슷한 생활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후배들 사례처럼요.
이직은 당연히 지금의 회사보다 좋은 곳을 향한다는 목표로 분명한 의도를 갖고 짜임새 있게 계획을 세워 전략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후회 없고 만족스러운 이직을 하려면 현실을 보다 냉철한 시각으로 꼼꼼하게 따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한 생각의 사치로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이직하고 또 얼마 안 돼 이직하는 생활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말처럼 회사가 바뀌어도 현실과 당장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며 깨달았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준비된 사람인가
흔히 새로운 회사를 찾을 때, 자신을 위해 마련된 곳이라며 누가 봐도 과분한 자리를 노리곤 합니다. 회사 업그레이드는 물론 경력과 적성에도 맞아떨어져야 하고, 연봉도 월등히 높아야 하며, 워라밸을 비롯해 각종 복리후생은 필수라고 말합니다.
<Drawing by AI>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운전자의 90%는 자신의 운전 능력이 평균 이상이라 생각하고, 교수들 중 94%는 자신이 평균적인 교수들보다 유머감각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실제 10개의 일만 하고도 15개의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심리 전문가인 스탠퍼드대학교 로버트 서튼 교수의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판단이 결여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국내 10대 기업에 다니던 선배는 입사 3, 4년차부터 이직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경력직으로 S전자의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직 눈높이가 S전자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이후 몇몇 대기업 계열사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입사를 포기하기도 했어요. 선배는 결국 9년의 회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내는 자리에 부합할 만큼 나는 준비된 사람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 평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착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인의 능력은 담당 업무 수행에 따른 성과와 결과를 비롯해 조직관리와 소통능력, 상사나 선후배, 동료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으며 구축됩니다. 지금 당장 부족한 사람이 갑자기 회사를 옮긴다고 능력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새로운 곳을 찾기 전에 필요한 것을 소크라테스가 알려주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진짜 마음, 준비 상태와 능력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직을 꿈꾼다면 자신이 새로운 회사에서 얼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입사 지원 전에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고 무엇을 성취했는지, 지금 회사에서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이성적인 정리가 필요합니다.
'지금 회사에서는 2% 부족했지만 다른 회사에서는 훨씬 잘 할 수 있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면접 시 내뱉을 수는 없습니다. 채용하는 회사에서 왜 그 직무에 경력직을 채용하는지, 그 회사에서 원하는 성과를 얼마만큼 창출할 수 있는지 충분한 고민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15년을 한 업무만 파다가 이직을 했음에도 부족한 점 투성이였습니다. 경력직에게는 기대치가 더 큽니다. 그만큼 일도 많고 책임도 무겁습니다.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걸 여전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직은 단순하게 회사만 옮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이직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한창 이직에 집착할 때, 서류전형 통과 후 헤드헌터에게 면접 예상지를 받고 기겁했습니다. 수십 가지의 예상 질문부터 옷차림, 헤어스타일, 표정, 제스처, 앉는 자세는 물론 피부관리에도 신경 쓰라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면접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영어 인터뷰 예상 질문’ 파일을 받고 나서입니다. 영어 면접까지 준비할 만큼의 역량도 의욕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의 필살기는 회사에 대한 분노와 탈출 계획뿐이었으니까요. 떠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충동적인 일탈은 허탈함과 좌절감만 남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악의 순간에 지배당하는 어리석음
회사에서 무기력한 선배가 집에 가면 갑자기 활기 넘치는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을까요? 회사에서 매사 부정적인 동료가 회사 밖에서 갑자기 긍정적인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회사를 떠나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저희 팀에 중소기업 7년차 경력의 과장 한 명이 입사했습니다. 상사와의 마찰, 반복되는 야근, 보람없는 업무에 염증을 느껴 퇴사했다고 하더라고요. 대기업에 입사해 인생 2막을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성급했던 이직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공채들에 비해 인사고과나 진급에서 차별 받고, 타부서와 업무 협조도 어렵고, 틈을 주지 않는 동료들 때문에 힘들다고 했습니다. 감정선은 여전히 바닥이고 이직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며 괴로워했습니다.
이미 바닥을 친 감정은 회사만 옮긴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순간만 탈출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최악의 상태에서 뛰쳐나오면 시작점은 다시 최악의 상황에서부터 입니다.
"예전에 물었지. 우리 삶에 신의 한 수가 있겠냐고? 이제 알겠어. 그런 묘수는 없다는 걸. 그냥 하루하루 묵묵히 사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지."
영화 <신의 한 수>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현재 상황을 한순간에 역전할 만큼 이상적인 한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반전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It couldn’t be worse!"라는 성급한 판단으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급급하면 비슷한 곳에 다시 착륙할 가능성이 크고, 또 다른 최악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어제의 불행을 오늘로 끌어들여 불행을 연장시키면 안 됩니다.
잠깐의 어둠에 좌절하면 안 됩니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한 장면>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 잠깐 보이지 않을 뿐이야."
블랙기업의 실상을 그린 일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명대사입니다. 지금 당장의 시련과 고통을 인생 전체에 대입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잠시 잠깐 어둠이 희망을 가리고 있을 뿐이니까요.
저 역시 사회 초년생 시절 회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뛰쳐나가는 상상을 하며 견뎠습니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오 과장 말을 맹신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버티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된다'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적응해 나갑니다. 고민 많고 시련은 더더욱 많은 직장생활입니다. 떠나면 분명 새로운 길에서 얻는 경험과 깨달음이 있고, 남으면 그 자리에서 얻는 교훈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떠나고 남는 문제가 아닌, 현재 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입니다.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가볍게 다음 스텝을 내디뎌도 늦지 않습니다. 탄탄하게 준비된 자만이 평탄한 길을 오래 걸을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