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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만원 수학 과외 능가하는 딸의 남다른 실력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니 기특합니다"

by 이드id


"또... 그놈이 딸아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자녀 교육에 진심인 아빠입니다. 교육과정이나 입시제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아이들과 시험 이야기나 진로 얘기도 종종 나누는 편이죠. 그런데 딸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조금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은 부모 욕심대로만 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수학. 고2 딸아이 발목을 잡는 과목입니다. 제 탓입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지!"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 수학 선행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억지로 시켜도 안 할 거라는 나름의 확신도 있었고요. 나중에 원망을 들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관련 글: 수학 선행 안 시켜서 망했다던 고딩 딸의 반전)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때까지 선생님들이 딸아이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선행을 안 해서인지, 수학이 점점 어려워져 흥미를 잃어서인지 고등학생이 된 후 수학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과를 선택했다가 마지막에 문과로 바꾼 이유기도 하죠.


중학교 때 다니던 작은 학원은 그저 시험 점수가 괜찮다는 이유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과정의 선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곳이었죠. 나중에 학원에서도 "다른 데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설렁설렁 노는 사이, 친구들은 전문 학원에서 고등 수학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고등학교 입학 한 달 여를 남기고, 어렵사리 자리가 난 학원을 찾아 고등 수학을 시작했습니다. 늦게 들어간 만큼 진도는 빠르게 나갔고, 이른바 기초반(딸아이 말로는 꼴찌반)에 합류하게 되었죠. 처음엔 고통스러워하던 딸도 조금씩 적응했고, 입학 후엔 남들보다 한두 시간 일찍 학원에 가서 공부도 하더군요.


"저 꼴찌반 일등 찍었어요."


멋진 반전이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수학은 날고 기는 애들이 기본 포지션을 지키고 있어, 등급을 올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계속 갈렸습니다. 본인도 괴로운지 과외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 수학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과외하면 어떨까요?"


스스로 공부하겠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작년 11월부터 주 3회, 월 105만 원짜리 수학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아이가 후회 없이 공부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뒷바라지를 시작했죠.


기말고사는 과외 시작 직후라 비슷한 점수, 같은 등급이었습니다. 6개월 정도 단련을 하고 드디어 2학년 첫 중간고사. 말은 안 했지만, 기대했습니다. 열심히 갈고닦은 실력으로 한 두 문제만 더 맞아도 한 등급 오를 정도의 성적이었기에.


시험이 끝난 주말, 함께 쇼핑을 나선 딸아이가 시험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수학 성적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보통 앞장은 거의 다 맞는데, 4개나 틀렸어요."

"왜?"

"빨리 풀려다가 제 글씨를 못 알아본 것도 있고, 2로 나눈 게 답인데 다 풀어놓고 안 나눈 걸 체크하고... 시간이 모자라서 마지막 5문제는 답안지만 보고 찍었어요. “

"망했네?"

"근데 찍은 게 4개나 맞았어요. 기도가 통했나 봐요. 수학 시험 볼 때만 기도했거든요."

속은 쓰렸지만, 딸의 당당함에 웃음이 났습니다.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기도 했죠.


며칠 뒤 과외 선생님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OO이가 실수로 4문제를 틀리면서 18.5점을 놓쳐서 너무 아쉬운 마음입니다. 실수도 실력이라...(생략)"


"실수로 4문제 틀리고, 찍어서 4문제 맞혔다더라고요. 문제 많이 풀고 실력 쌓을 수 있도록 지도 부탁드립니다."


수학 점수와 등수, 등급은 1학년 때와 비슷했습니다. 국어나 영어 학원비는 수학 과외비에 비해 새발의 피라 아깝지가 않은데, 수학은 자꾸 본전 생각이 났습니다. 과외까지 했는데도 찍다니. 찍은 게 다 틀렸다면 되레 역성장인 거죠.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딸은 중간고사 전, 다시 학원에 다닐까 고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많이 풀어야 하는데, 혼자서 잘 안 하게 돼서요. 학원에서는 많이 시키니까."


기말고사 후에도 성적에 변화가 없다면, 다시 학원으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학원에 다닐 때보다 역성장이라면 방법을 바꾸는 게 맞겠죠.


투자한 만큼 성적이 오르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녀 성적 걱정을 하겠습니까. 아이가 겪는 좌절과 시행착오도 배움의 일부라 믿기로 했습니다.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본인일 테니까요.


"수학 어렵고, 하기 싫으면 수학 비중 낮은 대학 위주로 지원하면 되지 뭐."

"이번에는 진짜 해보려고요." (근데, 평소에 시간이 없는데, 수학은 대체 언제 하란 거지?) 혼잣말도 덧붙이네요. 그래도 한번 더 믿어봐야죠.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딸아이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겠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꾸준히 반복하고, 실수에서 배우는 힘이 결국 성장의 자양분이 되리라 믿습니다.


공부는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죠. 부모는 그저 옆에서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는 조력자일 뿐이지요.


글을 마치며 생각해 봅니다. 105만 원의 본전보다 훨씬 더 값진 건, 딸아이가 여전히 수학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요? 실수하고, 찍고, 분했다가, 다시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모든 순간이 인생 공부 그 자체입니다. 어쩌면 성적보다 더 큰 성장을, 조용히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딸아이의 진짜 실력은 '찍기'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딸을 통해, 아빠도 오늘 한 뼘 더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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