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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도 안 먹고 잠만 잔다는 고딩 딸의 속사정

속상해하는 딸 보는 고통...아빠는 더 아픕니다

by 이드id


저는 학창 시절,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사재 교복 바지를 사서 입고, 어떻게든 사복을 입으려고 애썼고, 스포츠머리임에도 무스나 젤을 티 나게 바르고 다녔죠. 문제집 살 돈으로 옷을 사기도 했고요. 얼굴에는 여드름 치료에 좋다는 알로에 줄기를 잘라 바르면서 등교를 했죠.


"너희들은 머리랑 얼굴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그냥 다니는 게 제일 예뻐!"


선생님 말씀, 나이가 드니 무슨 말인지 절로 이해가 갔습니다. 자식이라고 다를까요. 고등학교 2학년 딸, 옷 잔치에 화장에 한창 멋 부릴 나이죠. 한때는 화장하다가 지각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그런데 한창 멋 부리며 상큼 발랄하던 딸이 최근 들어 부쩍 우울해 보였습니다.


"요즘 학교에서 잠만 자요. 급식도 안 먹고."


고등학교 1, 2학년 내내 급식 당번을 맡아 전교에서 가장 빨리 급식을 처리하는 노하우를 발휘하던 딸의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여드름 때문.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여드름. 처음엔 옅은 화장으로 가릴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강도가 점점 심해졌죠. 병원에도 다니고 약도 먹어봤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피부염이라고 했다가, 여드름이라고 했다가 갈피를 못 잡는 통에 딸아이 시름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화장을 하면 더 심해진다는 걸 알기에 딸아이는 모자를 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학교에 갔습니다. 마스크를 벗기 싫어 급식도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


"여드름은 다른 질환과 다르게 신체의 외적인 부위로 나타나고 표출됨으로써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심리적인 우울증 증상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여드름 피부의 상태에 따른 자아존중감과 대인관계에 관한 연구 논문 중>


하루하루 정도가 심해지니 덩달아 걱정도 커졌습니다. 여드름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한 피부 문제보다는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딸의 수면 부족과 학업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죠. 학업 강도가 점점 세지니 스터디카페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늦어지고, 잠은 부족하고. 여드름 때문에 딸의 자존감은 매일 무너졌습니다.


"학교에 나처럼 여드름 난 애들이 없어요. 저만 이래요. 애들은 화장도 안 지우고 자는데 여드름도 안 난데요."

"중간고사 끝나면 다른 병원도 가보고, 한의원도 가보자."

"당장 아니면 의미 없어요. 시험 끝나고 애들이 놀자는데, 싫다고 했어요."


자식의 고통을 가슴으로 앓는 게 부모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사귀기로 한 날 이후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다고. 스카(스터디카페)에 다닐 때도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니 집중도 잘 안된다고 했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 딸아이 고민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기저기 곳곳이 울긋불긋한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자식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런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 부모에게는 더 괴로운 일입니다.


부모는 못해준 것만 기억하고, 자식은 서러웠던 것만 기억한다고 했던가요. 딸아이가 마스크 속에서 흘렸을 눈물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살며시 모자 두 개를 선물할 뿐,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저도 속상해 눈물이 다 났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저한테는 스치듯 투정 부렸지만, 엄마한테는 울며불며 죽고 싶다고까지 했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외모에 한창 예민할 시기라는 걸 잘 알기에,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간다'는 섣부른 위로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시험이 끝나고 대학병원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딸아이는 시험을 잘 보면 카톡으로 성적을 알려주곤 했는데, 이번엔 시험 기간 내내 조용. 공부에, 여드름에, 남자 친구에 복합적인 고민에 공부가 제대로 됐을까 싶었습니다. 심지어 시험 기간에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푹 가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사실, 어른 입장에선 이깟 여드름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는 짧고,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마음껏 놀 수 없게 된 딸의 속상한 마음도 알겠기에 그저 조용히 있었습니다.


시험 끝나는 날, 딸내미가 오랜만에 홀가분한 얼굴로 들어와 말했습니다.


"국어만 빼고 다 망했어요!"


하나라도 건졌으니 다행입니다. 딸은 시험이 끝났는데도 정말로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후 3시부터 기절한 듯 아침까지 내리 잤습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제 방으로 달려왔습니다.


"아빠, 제 얼굴 봐요. 여드름 들어간 거 보여요?"


역시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와 부족한 잠이 원인이었을까요. 시험이 끝나고 잠을 푹 자니 여드름이 눈에 띄게 들어갔습니다. 맨날 새벽에 자던 딸아이는 그날도, 다음날에도 여드름을 박멸하겠다며 10시에 잠을 청했습니다.


"저 이제부터 일찍 잘 거예요."


여신강림2.jpg


잠을 많이 잘수록 조금이나마 호전되는 얼굴에 딸아이 표정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습니다. 며칠 뒤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 날, 거울을 보며 안심할 정도로 여드름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딸아이는 곱게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오랜만에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딸아이 여드름 고민에 공부 스트레스까지 줄까 봐, 시험 기간 동안 공부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시험을 다 마치고 딸내미는 자연스럽게 먼저 점수 얘기를 꺼냈습니다. 성적에 대한 아쉬움보다 일단은 딸아이가 평정심을 되찾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공부를 일찍 시작하긴 했는데, 막바지에 여드름도 심하고 집중이 잘 안 됐어요. 다음 주부터 다시 스카 가서 기말고사 준비할 거예요."

"벌써?"

"점수 보니까 아쉬워서요. 욕심이 생겼어요."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고, 욕심내서 보완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딸아이는 '다음 주부터 다시 스카 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았지만, 한 주가 지난날 카톡이 왔습니다.


"아빠, 저 오늘부터 스카 갔다가 갈게요!"

"파이팅!"


시험이 끝나고, 스트레스도 덜 받고, 잠을 푹 자니 여드름이 꽤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다시 시험이 다가오니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죠.


사춘기 시절에는 사소한 일들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어른이 다 비슷한 일을 겪었고, 결국은 잘 지나갔죠. 시간이 자동으로 해결해 주기도 했고요. 딸아이가 여드름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이 위기와 고난의 터널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길 바랍니다.


더불어 가혹한 입시 전쟁에 하루하루가 힘겨운 세상의 모든 수험생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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