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는 끝났지만, 아이들 진짜 삶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한 명의 어른

by 이드id


다니는 복싱장에 남자 회원 두 명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운동하러 온 대학생들인 줄 알고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만 나누며 각자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고3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처 일반고 학생이었고, 한 명은 고2 딸아이와 같은 학교였습니다.


한 학생과 잠깐 대화를 나누던 중 수시 원서 접수를 마치고, 대학 가기 전 살을 빼려고 복싱장에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만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습니다. 대학 입시, 내신, 원서 접수, 면접, 예비 번호, 학교 분위기, 이제 끝나가는 학창 시절의 마지막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안정으로 쓴 곳이랑 한 군데 더 붙었어요. 제가 문과인데, 이과로 지원한 학교는 예비 4번이래요."

"4번이면 합격하겠네."

"여기가 제일 가고 싶은데, 붙여줄 거면 그냥 좀 붙여주지, 사람 피 말려요."


학생은 이 학과가 취업이 잘 되는 학과라서 꼭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추가합격 발표가 오는 23일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나보다"라고 말하고 서로 웃었습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고, 학교는 계속 안 가다가 합격 등록 때문에 갔는데, 교실에 네 명밖에 안 와서 재미없었다고 했습니다. 할 일이 없어 엄마와 종일 집 청소를 했다는 이야기, 자신은 깔끔한데 초등학생 동생이 지저분해서 늘 비교당한다는 이야기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다 쏟아냈습니다.


저 역시 딸아이 학교 이야기와 수행평가, 동아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냈고, 이 학생은 곧 고3이 되는 딸아이까지 응원하면서 꼭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택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 아이들과도 잘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를, 처음 만난 학생과 이렇게 편하게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습니다.


입학도 하기 전, 인생 계획표를 짜는 예비 대학생


얼마 전 또 다른 고3 학생과 둘만 도장에 있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눴습니다. 처음 말을 튼 건데 정말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입시는 끝냈어요?"라는 질문에 "수시로 끝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이제 학원비나 과외비 같은 교육비 안 들어서 부모님 한숨 돌리시겠어요. 등록금은 저금리 대출도 잘 나오니까."

"네… 그런데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가서 기숙사비, 식비, 용돈까지 하면 한 달에 백만 원도 넘게 들 것 같더라고요. 죄송스러워서 오전에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기특하네요."


이어 학생 부모님께서는 일단 지방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편입한 후 군대에 가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요. 학점도 좋아야 하니까. 요즘은 토익 점수로만 뽑는 학교도 있던데."

"입학하자마자 공부만 해야 해요. 편입하고, 졸업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요."

"나도 평생 그렇게 살았네."


저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학생이 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래도 딸도 있고, 아들도 있고, 가정 꾸리시니까 좋지 않으세요? 애들한테 복싱 배운 거 자랑도 하고요."

"아… 좋지. 재미있지. 돈이 좀 많이 들지만?"

"저도 부모님 고생하시는 거 아니까 대학에 가기 전에 아르바이트 많이 해서 돈을 모으려고요."


저는 "복싱 연습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잘할 거 같아"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고3 학생의 모습이 자식처럼 예뻐 보였습니다. 기분 좋은 대화였습니다. 더불어 입학도 하기 전 학점, 편입, 군대라는 걱정부터 두 학생 모두 취업이라는 인생의 일정표까지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는 게 왠지 짠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대학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 다음 관문으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있는 듯했습니다.


부모가 아닌 어른에게 털어놓는 마음


이런 장면은 복싱장만의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학교 밖 체육관, 독서실, 아르바이트 현장 등 일상의 공간에서 비슷한 대화가 조용히 오가고 있지 않을까요.


딸은 곧 고3이 되고, 아들은 고등학생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고3 학생들과의 대화가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저 학생들은 집에서도 부모님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까?', '우리 아이들도 낯선 어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일상에서는 쉽게 하지 못할 개인적인 이야기나 속마음을,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에게 오히려 더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는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순간, 이 용어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학생들도 이러한 마음으로 편하게 이런저런 속마음을 꺼내 놓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복싱장에서 만난 '편안한 아저씨'였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였을 것입니다. 성적을 평가하지도, 진로를 재단하지도, 조언을 강요하지도 않는 어른. 그저 같은 공간에서 땀 흘리며 운동하는 동료 같은 존재였기에, 학생들은 부담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겠죠. 부모도, 교사도 아닌 어른과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과 앞으로의 삶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학생들과 잠깐 나눈 대화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입시는 끝났지만, 아이들의 진짜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더불어 펼쳐질 불확실한 인생에 대한 불안 역시 점점 더 심화될 것입니다. 수시가 끝난 이후의 고3 교실은 비어 있고, 심리적으로도 공허한 상태에 접어듭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학교에서 나와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직전, 아이들 마음은 어떨까요. 부모보다 편한 어른에게 자신의 불안과 고민을 먼저 꺼내 놓은 마음,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그저 자기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요.


이제 막 숨통이 트인 지금의 고3들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컨설팅도, 대학 공부와 취업과 같이 당장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인생 설계가 아닐 것입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지금까지 고생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을 사람, 아무 평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줄 한 명의 어른일지도 모릅니다.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곧 성인이 되는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의 울타리나 제도적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복싱장에서 만난 고3 학생들, 이미 학교 밖에서 어른이 되는 연습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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