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전 장에서 플레이어가 내용이 아니라 모든 내용을 경험하는 주체인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이 알아차림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을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바타(관찰대상-행위,생각)와 플레이어(관찰자)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연습을 했다. 나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보는 알아차림이다. 이 아바타와 거리두기만으로도 우리는 생각과 행동에 매몰되거나 특정 생각을 거부하려고 하는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용성을 넘어서 조금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아바타는 세상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을까.
생각하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다.
컵의 하얀색과 커피의 검은색을 본다.
희미하게 남은 쓴 냄새를 맡는다.
쓴맛을 느낀다.
컵의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커피가 식었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의 뒤에는 반드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쓴맛이라는 감각과 그 쓴맛을 알아차리는 감각은 정말 분리되어 있는가. 알아차림이 없는 쓴맛은 경험될 수조차 없다. 쓴맛이라는 경험 자체가 알아차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검은색 커피를 봄이라는 경험도 부분적 알아차림으로 만들어졌다.
커피의 차가운 감촉도 부분적 알아차림으로 만들어졌다.
커피가 식었다라는 생각도 부분적 알아차림으로 만들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는 '알아차림이라는 동일한 근원'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세상을 나와 나, 아닌 것,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으로 나누어 인식한다. 이것이 분별적인 알아차림이다. 이 분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저것은 벽이고 나는 벽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부딪히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을 보면 알아차림 안에서 부분적(분별적) 알아차림으로 세상과 나라는 경계선을 그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은 이 사실을 범아일여(나와 세상이의 본질이 하나임), 불이(둘이 아님) 등으로 표현해왔다.
플레이어인 알아차림(관찰자)과 아바타와 세상(관찰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