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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Sep 09. 2020

도시락 싸는 날

육아 십 년

  2015년, 대학원을 그만두고 첫째를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기면서 도시락 싸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보육에 중점을 둔 어린이집에서는 급식이 기본이었지만 유치원은 달랐다. 첫째가 들어가게 된 유치원은 원칙적으로 도시락을 싸야 했다. 도시락 통을 고르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렸던 것 같다. 잡화점을 들락날락한 끝에 집어 든 것은 검은색 타원형이었다. 그 통을 세 아이가 썼으니 누구의 취향에도 거슬리지 않는 심플한 모양을 고른 건 정답이었다. 지금도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제품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지만 말이다.


도시락 맛의 비결은 기다림

  싸고 싶은 도시락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서 도시락 싸기는 시작된다. 도시락 더 비기닝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 내일 쌀 걸 오늘 정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은 도시락의 모습을 막연히 그려보는 것이다. 밥을 자동차 틀로 찍어 보고 싶다, 계란말이 속에 모양을 낸 스팸을 넣으면 귀엽겠다 등등. 평소 도시락용 요리책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며 갈무리한 이미지로 구체적인 도시락의 그림을 조금씩 완성해간다. 적어도 일주일치는 그려놓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장 보러 갔을 때 필요한 식재료가 눈에 띄고, 식사 준비를 할 때 도시락용으로 조금 덜어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리 해둔 작은 수고들이 쌓여 있으면 도시락 싸기가 수월해진다. 

  전날에는 해놓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준비해놓다. 차가워져도 괜찮은 반찬은 완성시켜놓고, 고기류는 굽기 바로 전까지 조리해둔다. 건조 파스타는 찬물에 담가놓으면 아침에 삶지 않아도 되니 시간을 벌 수 있다. 해동해야 할 것을 미리 꺼내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침에 하는 일은 준비한 것을 익히거나 데워서 도시락통 안에 잘 담는 것이다. 아직 밥 먹는 것이 서툰 나이라 혼자서도 먹기 쉽게 적당한 크기와 순서로 넣는 것이 중요하다. 의외로 요령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요리에는 큰 자신이 없지만 도시락 싸기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다. 레시피북 보는 것도 즐기고, 다른 사람이 싼 도시락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래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동시에 도시락을 완성시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 어쩌다 늦게 자는 날이면 당장 도시락부터 걱정된다. 피곤함이 이어질 때는 냉동식품에 의존하거나 지난 저녁 먹었던 반찬을 적당히 채워 넣고 싶을 때도 있다. 실제로 그러기도 한다.

  막내네 유치원에서 오후 보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이가 실내화 갈아 신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신발을 다 신자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보호자는 당황해서 가방을 다시 챙겨주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고, 어쩐지 마음이 뭉클했다. 도시락 먹는 것이 유치원 생활에서도 큰 기쁨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막내도 유치원에서 처음 배워온 문장이 “오벤또 오이시이(도시락 맛있어).”였다. 그 마음 앞에서 귀찮다, 성가시다는 너무 매정한 말이란 걸 새삼 느낀다.

  아이가 좋아한다고 다 해주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은 나도 꽤 좋아하는 편이니까 할 때까진 열심히, 즐겁게 할 생각이다. 모처럼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겸허함은 남아서

  첫째 때 싸준 도시락 사진을 찾아보니 소박하고 심플하다. 이걸 만드는 데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첫째 육아를 둘러싼 모든 일이 그렇듯 힘은 배로 들지만 결과는 보잘것 없었던 셈이다. 그래도 첫째는 도시락을 잘 먹는 아이였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해 평소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버섯이나 토마토 같은 반찬을 한두 개씩 끼워 넣었다. 보니까 아이들은 도시락을 꼭 비우더라고.

  그게 큰 오해였다는 것을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간 후에 알았다. 둘째는 싫어하는 반찬은 절대 먹지 않았다. 얘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도시락은 꼭 다 먹는 건데. 다시 시도. 그렇게 몇 번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후 아이가 폭탄 발언을 했다. “난 도시락에 싫어하는 반찬 있는 게 너무 싫어!”

  얼마나 타당한 말인가. 뭘 잘못 알고 있던 건 나였다. 오전 내내 기다린 끝에 도시락을 열었더니 싫어하는 반찬이 얼굴을 내밀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첫째는 도시락이란 다 먹어야 하는 법이라는 자신의 윤리관을 우직하게(아마 때로는 힘겹게) 지켰던 것뿐이다. 뒤늦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첫째 때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둘째를 키우며 뒤집히고, 둘이나 그랬으니 당연히 이러겠지 예상했던 것이 셋째 때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 부딪혀서 피했더니 저기에 부딪힌다. 그 덕분에 나는 적어도 아이가 도시락을 남긴다고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아이들은 도시락 다 비우고 오는 거 아니에요?” 하고 말하지는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 달 간의 방학이 끝나고 다시 도시락 싸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개학 후 첫 도시락은 동화책에 나오는 대로 해달라는 주문이 이미 며칠 전부터 있었다. 미트볼, 계란말이, 데친 브로콜리, 으깬 감자 샐러드, 당근 절임, 문어 소시지, 검은깨를 뿌린 흰 밥이 들어간 기본 구성 도시락이다. 첫날인데 특별한 반찬이나 꾸밈이 필요한 게 아닐까 고민하다가 결국 동화책을 펼쳤다. 기다림이 맛을 더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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