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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Sep 16. 2020

작아서 가여워라

육아 십 년

  첫 임신 땐 배냇저고리를 다 만들었다. 완성된 아기 옷을 빨아 널며 이렇게 작은 옷을 입는 아기라면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던 날이 있었다. 그 작은 아기가 몰고 올 폭풍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볼 수도 없었던 자신의 무지에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만 말이다. 몰라서 다행이었지, 알았다면 빨래하다 말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때문에 미리부터 울지 않았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아기는 태어나면 계속 자란다. 매 계절 조금씩 큰 옷을 사야 하고, 아직 낡지 않은 신발을 작아서 바꾸어야 한다. 갑자기 복잡한 문장으로 말하고, 어려운 단어를 꺼내 쓴다. 어제는 못했던 걸 오늘 한다. 매일 보는데도 꼭 몰래 크는 것만 같다.

  죽순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라 새삼 작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면 꼭 습격당한 기분이다. 아이들이 여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에.


너에겐 너무 큰 구멍

  요 일 년 간 그 습격은 보통 공중화장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막내가 기저귀를 떼고 난 후부터. 기저귀 교환대는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 같지만 어린이용 화장실은 그렇지도 않다. 어른용 변좌에 올려두는 보조 변좌가 있는 곳도 거의 없다. 그러면 기저귀를 뗀, 그렇지만 아직 어른 변기에 앉을 수 없는 아이들은 밖에서 어떻게 용변을 보아야 할까.

  아마 아무도 관심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 변기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용 변기라는 것도 거의 대부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한다. 이것도 아이마다 다를 것이다. 밖에선 전혀 화장실을 찾지 않는 아이도 있고, 집에서 해결하고 나왔으면 편할 걸 꼭 밖에 나오면 화장실을 가려는 아이도 있다. 막내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아이인 듯 놀이터에서 놀다 말고,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아이 손을 붙잡고 공중 화장실로 내달리는 일이 빈번하다.

  화장실에 가면 나와 아이와 변기가 있다.

  흠.

  이것저것 생각하기엔 닥친 일이 급하니까 일단 아이 옷을 내리고 변좌 위에 올려준다. 자연의 섭리대로 어른의 엉덩이는 크고 아이의 엉덩이는 작기 때문에 어른 변기에 앉은 아이는 위태롭다. 아이가 어렸을 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깻죽지를 안아 줬다. 지금은 아이가 내 다리를 끌어 안는다. 그러면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앞의 벽을 바라본다.

  일본의 공중화장실은(한국도 그러리라 믿지만 아무튼) 어디를 들어가도 깨끗한 편이다. 변두리 놀이터 안에 붙어 있는 곳도 늘 청소되어 있고, 휴지가 없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화장실은 화장실. 머무르기보다는 떠나고 싶은 공간이다. 게다가 타인의 용변에 참관하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더. 그게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라도 말이다.

  아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엉덩이에 맞지 않는 변좌 위에서 앉아 남에게 몸을 의지한 채 볼일을 보는 건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닐 것이다. 함께 있는 것이 아무리 엄마라도. 그래서 그럴까 요즘에는 엉덩이를 보지 말라는 주문이 추가되었다. 고개를 들어 벽을 본다. 하반신에는 힘을 주느라 체온이 올라간 아이의 따뜻한 몸이 붙어 있다. 나도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밴다.


  세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가장 많이 한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는 그럴 땐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고맙습니다”라고 해야지 혼자 비평하지만, 밖에 나가면 어김없이 “죄송합니다”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마 나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 쥐 죽은 듯 다니는 온순한 보호자였으리라. 하지만 아이와 화장실에서 부둥켜 앉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다 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못 들어오게 하는 가게들도, 아이가 좋다 싫다 쉽게 하는 말들도, 아이의 본성은 악하다 선하다 하는 논리들까지. 아이가 똥 쌀 곳도 마련해주지 못하면서 어른들은 아이를 두고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서로의 몸을 붙들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분, 15분은 지났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일 것이다. 물을 내리고 나오면 모든 게 긍정적으로 비친다. 아이가 커서 혼자 화장실을 다니게 되면 더욱 희미해지겠지. 내가 아이였을 때 기억은 나지도 않는다. 아마 결국은 다들 그런 것일 테다.


무릎을 꿇은 눈높이의 세상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나중에 확인할 때도 아직 다들 이렇게 작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는 첫째조차 아직 한참 더 커야 할 것 같다. 막내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건 대부분 수납장들. 혼내기라도 한 날이면 허리에 손을 짚고 우뚝 선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게 보였을지 뒤늦게 후회된다. 혼낼 만해서 혼냈겠지만, 적어도 무릎을 굽히고 아이 얼굴 높이까지 시선을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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