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시장과 시그널링 효과
▶ 채용 시장은 '레몬 시장'이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단연 ‘스펙’이다. 스펙이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제품의 사양이나 설명서라는 뜻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상품으로 비유된다는 사실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대다수의 취업 준비생들은 오늘도 자신의 이력 한 줄이라도 더 넣기 위해 자격증 학원을 다니고, 때론 열정 페이조차 감수하며 직무 경력을 쌓고 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스펙에 목을 매는 것일까? 경제학 개념인 ‘레몬 시장(Lemon Market)’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자.
레몬 시장은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제품에 대한 정보의 차이, 즉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c information)으로 인해 양질의 제품보다는 낮은 품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레몬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다지 맛은 없는, 우리말로 치면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레몬 시장의 대표적인 예시는 중고차 시장이다. 중고차 시장에서는 겉보기에는 새 차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차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외형보다 중요한 자동차의 성능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실제로 부품 교환 주기를 잘 지켜 왔는지부터 엔진 같은 핵심 부품에 문제가 있는지는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과거 침수 경험 등 치명적인 하자마저도 구매자 입장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즉, '정보의 비대칭성'이 있는 시장이다. 중고차를 판매하는 이들은 불리한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구매자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일단 가격을 더 낮추어 사고 싶을 것이다. 반면 상태가 좋은 중고차를 팔고자 하는 이들은 굳이 저렴한 가격에 처분하고 싶지 않다. 결국 양질의 제품보다는 그저 그런 제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레몬 시장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은 채용 시장에서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들은 본인의 투철한 도전정신과 이 한 몸 회사를 위해 바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다. 자기소개서에도 자신이 쌓아온 빛나는(?) 업적과 화려한 이력이 쓰여 있다. 하지만 인사팀에서 지원자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이 같은 말들이 진실인지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취업 준비생들은 중고차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치명적 결함에 대해서는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채용 담당자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어떨까? 한 언론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입사 이후 1년 이내 퇴사하는 신입 직원의 비율이 30%에 달하고, 2명 중 1명은 입사 2년 이내에 퇴사를 한다고 설명한다. 설령 회사에 남아 있다고 해도 기여도가 현저히 낮아, 요즘 말로 ‘월급 루팡’이라 불리는 무임 승차자(Free rider)들도 많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기업 인사팀 입장에서 구직자가 주장하는 개인의 역량과 기업이 파악해낼 수 있는 정보의 한계, 즉 비대칭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냉정한 현실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채용 시장은 필연적으로 기업이 찾는 소수의 능력 있는 인재와 그렇지 않은 다수의 인재들이 뒤섞여있는 레몬 시장인 것이다.
▶ “아놔, 신입사원을 뽑는데 경력을 왜 물어봐!!” : 수요자 우위 시장 (Buyer’s market)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취업 준비생의 애환을 담은 한 장면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놔, 신입 사원을 뽑는데 왜 경력을 물어봐!”라며 버럭 면접관에게 따지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을 보며 속이 후련해지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능의 일이다. 채용시장에서 구직자는 대체로 을의 역할을 맡으며 기업의 요구 사항을 철저히 수용해야 한다.
필자도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취업 준비생 입장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기업의 요구사항이 많았다. 해당 기업이 이익을 더 많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디어를 기획해 입사 서류와 함께 제출하라고 하거나, 합숙 면접을 필수로 요구하는 등 철저하게 기업에게 유리한 뱡향으로 채용 과정 또한 있었다. 이런 까다로운 절차에도 불구하고 이 기업들의 입사 전형은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했다. 채용 시장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채용 시장은 경제학 용어로 ‘노동 시장(Labor market)’이라 불린다.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자는 인력(구직자)이고, 수요자는 고용주(기업)이다. 구직자가 많은 만큼 일자리 수요가 늘어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자리는 인력의 공급과 무관하게 변하지 않는 ‘비탄력적' 성질을 갖는다. 채용 시장에서 구직자가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일자리의 개수는 한정적이라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노동 시장은 전형적인 ‘수요자 우위 시장(Buyer’s market)’이라고 불린다. 만약 경기가 불황을 겪으면 실업자가 발생하고 구직자들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기업의 일자리는 변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요자 우위 현상은 더욱더 심화된다.
예를 들어 삼플전자가 10명의 채용 공고를 냈다고 해보자. 20명의 지원자가 응시했을 때보다 2000명의 지원자가 있을 때의 삼플전자의 수요자 우위 현상은 더 강화된다. 결국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해 전문 자격증, 제2외국어, 근무 경력 등 더욱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거나, 지원자가 많은 것을 이용해서 애당초 제시하려 했던 연봉을 조금 더 낮춰 볼 수도 있다.
이를 경제학 그래프로 표현해보자. 노동 시장에 구직자의 공급이 늘어나면 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수요 곡선이 수직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y축의 균형 임금은 하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레몬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 : 스펙의 시그널링 효과(Signaling effect)
앞서 다룬 내용처럼 채용 시장은 적합한 인재들과 그저 그런 구직자들이 섞여 있는 레몬 시장인 동시에, 기업이 유리한 포지션을 가져가는 수요자 우위 시장이다. 그럼 기업은 양질의 인재를 가려내기 위해, 구직자들은 자신들이 레몬이 아님을 어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레몬 시장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그널링 효과(Signaling effect)’라는 경제학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 상대방이 품질에 대해 신뢰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중고차 시장에서는 구매 후 1년간 무상 보증 기간을 제시하는 것이 시그널링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자, 판매하려고 하는 차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무상 보증을 제시할 리가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채용 시장에서 스펙은 구직자가 기업에게 어필하는 시그널링 방식이다. 예를 들어 높은 학점은 지원자의 대학 생활 동안의 성실도와 전공 지식수준을 나타낼 수 있다. 토익, 토익스피킹, HSK 등과 같은 어학 점수는 분명히 지원자의 외국어 활용 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각종 자격증이나 근무 경력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분야의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것은 특정 분야의 관심도와 일정한 지식수준을 증명한다. 만약 해당 직무와 관련된 근무 경력이 있다면 다른 지원자들보다는 업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낼 수 있다. 최소한 이런 사항들은 지원자들이 자기소개 등을 통해 스스로 주장하는 역량보다는 기업의 인사팀에게 객관적이고 신빙성 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 취업 이후에는 스펙이 중요하지 않을까?
스펙은 비단 대학을 갓 졸업한 구직자들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직장인들 가운데 한 번이라도 이직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직 시장은 취업 시장보다도 채용 인원이 훨씬 적고 좋은 기업일수록 수많은 경력자들이 몰린다. 제한된 시간 내 인사팀에서 모든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면접에서 그들의 경력 사항과 이전 회사에서의 성과를 듣고 진위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경쟁력 있는 어학 점수를 유지하고, 시간을 내어 전문 자격증을 취득 했거나 동종 업계에서 경험을 쌓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시그널링을 보내는 이직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스펙이 비록 완벽한 잣대가 되진 못할지라도, 채용 시장과 이직 시장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당락 요소가 되는 이유이다. 최근에는 자기만의 UCC 동영상, 포트폴리오 등 구직자들의 장점을 나타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시그널링이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채용 담당자의 입장에서 가장 손쉽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스펙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