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60] 노잼 일은 절대 못하는 타입, 35년 약사 외길 가능?
안녕하세요.
저는 건강한 약국과 건강한 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약사이자 사회복지사 이미선 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 동네에서 약국을 한지는 이십몇 년 됐어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건 한 10년 좀 넘었고요.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니까 어떻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고, (사회복지학이) 인간 행동이나 상담이나 이런 부분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가능하고요. 그런 걸 바탕으로 상담이나 지원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죠. 또 받기도 하고요.
제가 80학번이에요. 학교 들어가자마자 열심히 데모하러 다녔고, 약대에서는 보기 드문 운동권 출신이었어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교도소 갔다 와서 다시 약사가 됐고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좀 나지만, 그때는 위대한 혁명가로 살고 싶었어요 진짜. 그런데 당시 노동운동하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경제를 제가 책임을 져야 됐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저를 좀 옥죄었던 것 같아요. 진료 봉사 활동도 계속 하기는 했는데, 의무와 당위로 했던 것이고 그것 자체가 즐겁거나 신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아이 아빠와 이혼을 하고, 여기가 제 고향이거든요. 이리로 다시 오면서 마주한 게 미아리 텍사스 성매매 집창촌이에요. 88번지. 여기로 돌아올 때 빚 잔뜩에 아들 하나 데리고 왔거든요. 그때는 정말 하루 네 시간 자고 약국을 했어요. 계속 돈 벌어서 빚 갚고, 빚 갚고. 그때 오로지 돈 버는 거에만 집중했으면 빚을 빨리 갚을 수도 있었겠죠. 아파트 한 채라도 가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더 안락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근데 그러지는 못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친구들의 아픔 같은 것을 외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약을 그냥 무상으로 주기도 하고요.
제가 이쪽으로 들어온 게 2004년이거든요. 바로 앞 집이 2005년에 불이 났어요. 성매매 여성 다섯 명이 불에 타 죽은 큰 사고가 있었죠. 그 일이 저를 바꾼 계기예요. 막 약국을 시작했던 20대의 저와 2005년 성매매 아가씨들의 죽음을 본, 화재사건 이후의 제가 다른 거죠. 그때 죽은 친구들 중 한 두 명은 저랑 얘기도 많이 했던 친구들이거든요. 벌써 16년 정도 되는 일이라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때 그 친구들과 나눴던 이야기들, 앞으로 하고 싶어 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해요. 그때 도움을 원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제가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어요. 성매매 여성이라고 다 모두 다 돌을 던지는데, 나까지 돌을 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 친구들 삶이 좋다거나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없었던 사정, 그것에 그냥 눈물을 같이 흘려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그런 이모가 되자 했죠. 그때부터 제가 약사 이모로 불리고 있어요.
철학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제가 살아가는 삶의 모토, 나는 이런 방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면그 대답이 될 거 같은데요. 약사라는 지위가 가져오는 경제적인 안정감이 저도 싫지는 않아요. 저도 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봤거든요. 저희 약국 수익은 진짜 저 먹고살고, 아들 하나 대학 보내고, 아버지 병원비 대고 그렇게 살기에도 사실 빡빡했어요. 그 빚들을 지금도 나가고 있고. 근데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 다 사실은 시한부 인생이에요. 저 끝에 죽음이 있고, 우리는 그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져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죠. 네. 낫띵이에요. 내 코 끝에 마지막 호흡이 오고 가는 그 순간까지 내가 무얼 하며 사는 게 가장 행복할까. 내가 어떻게 사는 게 제일 좋을까 하는 선택과 판단, 집중은 자신의 몫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이 길을 선택한 거예요.
제가 올해 나이가 환갑이에요. 그런데도 피부가 맑고 깨끗하고, 봐줄 만한 얼굴인 거는 내 마음속에 자존감도 좀 높은 편이고 행복함도 가득하고.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좋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약사가 어떤 지위로 이용되지 않는 삶을 선택했음에 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원동력은, 제가 갖고 있는 어떤 것을 나누는 거잖아요. 저에게 도움받으시는 분들이 더 좋겠다 하실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제가 훨씬 더 기뻐요. 그 힘이 저에게 더 많이 와요. 금천구에서 반찬통 12개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반찬동을 가지고 오면, 저는 바빠져요. 이모님, 반찬통 왔어요 가져가세요 하고 전화를 돌리고, 또 두 분은 약국 잠깐 닫고 제가 가져다 드려요. 밖으로 못 나오시니까. 그날 바로 반찬통 12개를 다 소화해야 해요. 상하면 안 되니까. 그러다 보면 되게 바쁜데, 정신도 없고 약국도 하랴. 그런데, 오늘 하루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사실 제가 한 건 전화 몇 번 밖에 없어요. 반찬도 다른 분이 만들어서 후원하셔서 약국까지 가져다주시는 거고. 이런 과정들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와 힘 이런 게 막 무럭무럭 솟아나요. 그러면 그걸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은 저 예요. 그러니까 바쁘고 힘들어도 아프거나 지치거나 그런 거 없이 일을 잘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많이 다르죠. 그 시절에는 그 힘들었기 때문에. 아마 요즘도 그럴 거예요. 힘든 청년들은 50대, 60대의 삶을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너무 힘드니까. 내가 중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데 미래의 삶을 뭘 생각하겠어.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죠.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저도 그랬던 거 같아요. 20대 후반, 30대 초반 제가 제일 힘들었던 시절에는 그랬어요. 아이도 낳고, 지금은 삶이 이렇게 다양해졌지만 그때는 지금의 이런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어요.
참 어렵죠. 내가 20대를 보냈던 건 80년대인데, 지금 20대를 보내면 나는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근데 아마 똑같이 살았을 거 같아요 저는.
저는 일단 자신의 기운, 우리가 다 기운이 있잖아요. 요만큼일 수도 있고 이만큼일 수도 있고 이~만큼일 수도 있는데 이 기운의 사이즈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달라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다르니까. 다만 기운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다 있어요. 그럼 내 기운에 맞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내가 기운이 요만큼이야, 근데 이만큼인 사람처럼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기운이 금방 떨어지겠죠?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되고, 우울해지고. 그럴 때는 조용히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내가 나에게 갖는 불만이 무엇인지 쭉 적어 보는 거예요. 1번 게으르다, 2번 밥을 너무 많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그중 예를 들어 나는 몸이 44, 55 사이즈를 원한다 근데 난 지금 77이야 그러면 이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 건 하나씩 지우는 거예요. 가능한 거만 챙기고. 거기에 자신의 기운을 집중하고.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거죠.
그다음에 또 한 가지는 보따리 요법이라고 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것들, 그런 걸 보자기에 싸 가지고 딱 쳐버리는 거예요. 내 삶의 레이어가 아닌 다른 쪽으로 버려주는 거죠. 고민은 버리자. 왜냐하면 도움이 안 되니까. 자를 건 잘라서 버리고, 앞으로 가야지. 어차피 나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데, 고민하고 짜증 내기에는 너무 짧잖아. 그 짧은 걸 거기다 쓴다는 건 바보죠. 나는 바보로 살고 싶지 않거든.
이런 말이 우리 일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다가 잘 안 되는 거 있으면 저희 약국 오셔도 돼요. 제가 상담해드릴 수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삶을 호두껍질처럼 딱딱하게 만들지 마시고, 복숭아 껍질이나 살구 껍질처럼 폭신폭신하게 만들어 주셔야 돼요. 호두 안에 있는 알맹이를 깨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죠? 망치로 깨 부수어야 돼요. 말랑말랑하게 내 삶도 만들고 그래서 내가 가진 걸 바깥으로 내 보내고, 또 바깥에서 좋은 게 있으면 내가 속으로 들여보내주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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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서 들리는 음성지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미선님의 호탕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