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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Dec 12. 2019

나의 임신이야기 (2) 인큐베이터 자리가 없어요

(전편에서 이어짐)


그렇게 나는 엉엉 울며 임신 30주, 고위험군 환자로 분류되어 큰 병원으로 강제 전원 되었다. 다니던 병원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여력도 없이, 두려움, 충격, 걱정으로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내가 제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너희들을 고소할꺼야, 적어도 진실에 근거한 악플러가 되어 다른 산모들을 보호하리라"

정의로운(?)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나는 새로운 병원의 새로운 담당 의사선생님들을 만나러 갔다.
(여기서 잠시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나는 대개의 경우 의사선생님들을 과도할 정도로 무척 존경한다. 운좋게도 여러 명의들을 만날 기회가 다수 있었고, 의사선생님들의  같은 전문성과 명쾌함을 사랑한다. 신뢰했던 만큼 배신감이 컸다.)

내가 살고 있는 구/지역에서 큰 종합병원이었다. 그래 믿자 다 잘 될꺼야.... 내 혈압은 긴장된 탓인지 지난 번 보다 훨씬 더 높았다. 오늘 당장 격리된 치료 공간인 ICU  입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렇게 내 생애 첫 입원은 시작되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자면회시스템을 가진 나라. 일반병동도 ICU도 예외가 없다.  8-9시가 되면 모든 보호자들은 나가야 한다. 테레비도 없다. 입원 첫날, ICU에 다른 고위험군 산모들과 혼자 남겨졌다.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줄  남편, 함께 울어줄  남편이 사무치게 보고싶었던 밤이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충격받으실까봐 연락도 못한채 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남편도 홀로  여자를 잃을까 두려운 밤을 보냈다고 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생각하지말자"
"그래, 다 잘될꺼야"
"혹시 최악의 상황이 오면, 내가 죽더라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수술하지 않겠다고 출산하지 않겠다고 하루라도 더 버티자"
"그럼, 내 남편은? 불쌍해서 어뜨케 두고 가나? 그래 혹시라도 선택을 해야할 순간이.... 만에 하나라도 온다면 마음을 강하게 먹고 나를 선택해야해"
"그럼 내 딸은? 혹시라도 평생 아프거나 불편하게 살면 어떡해?"
"그래 아가야 니가 먼저야.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미친 사람 같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수만가지의 가능성을 재고 울고 웃고 있었다. 혈압약을 먹고 30분 마다 혈압이 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혈압을 재러 왔다.  긴장되어 혈압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불안했고 미친 생각들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잊어야 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성경을 폈다. 색칠공부 책도 펴보았다. 음악도 들어봤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라고 했다.

"안그러면 혈압이 계속 올라 뇌출혈이 생길지도 몰라요". ( 귀엔 "자꾸 그러면  머리가 터져 버릴지도 몰라!!" 라고 들렸다)

자려고 노력했는데.....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을 못자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왔다. 극심한 두통은 뇌출혈의 나쁜 징조란다. 두통과 함께 구토, 마비, 동공 풀림 등의 증상이 오면 나도 아이도 위험한 것이란다.

회사에서는 괜찮냐고 연락이 빗발쳤다. 병문안 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차마 만날 자신이 없었다. 퉁퉁 부은  모습, 불안정한  마음,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같은 눈물, 나는 철저히 무너져있었다.

그럭저럭 병원 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마음의 안정을 조금씩 찾았다. 붓기는 점점 심해져 온 몸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몸무게는 단숨에 5-6키로 이상이 늘었다. 더이상 IV 정맥주사를 놓을 혈관이 없어 팔다리는 시퍼렇게 멍들어갔지만, 나는 하루하루 배속의 아이와 함께 버틸  있는 것에 행복했다.

아기가 하루라도  건강히 자랄  있는 시간을 주는 .... 최소한 태어날  스스로 호흡할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 그게 내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주치의선생님이시란 분이 오셨다. 한번 정도 만났을까.

"현재 상태로는 언제라도 아기를 꺼내야 할지 모릅니다. 주말이 될 수도 있고...  문제는 지금 우리 병원에 인큐베이터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근처의 10분 거리의 다른 병원으로 가시기를 추천합니다. 우리가 어레인지 하겠습니다"
"나는 안갑니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때 인큐베이터 자리가 있었고, 갑자기 없다고 하면 어떡게 하나요? 내가 이제야 병원생활에 적응을 했고 안정을 찾았는데, 다시 또 가서 적응을 어떡게 하나요. 병원을 옮긴 첫날 내가 또 잠 못들고 아파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요."
"......"
"인큐베이터 자리 만들어주세요 저는 못가요"

이전 병원에서 못한 따져묻기를 미약하나마 원없이 했다. 남편은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ㅇㅇ야, 인큐베이터 없으면 우리 아기 죽어.... 다른 병원으로 가자"

세상 내 남편, 모든지 내가 먼저고 내가 하자는 데로 다 해주려고 노력하는 남편. 그가 옳다. 내가 여기서 고집 부려봤자, 남대문시장에서 백원 이백원 깎는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한마디에 나는 냉정을 되찾고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인생 여정을 함께 할 한 팀이란 것을 다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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