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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Feb 13. 2019

소설 너는 내 운명

『안나 카레니나』첫 문장 릴레이 글쓰기 (소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동안 고마웠어. 민철의 사랑 영원히 잊지 않을게."

"응, 그래. 어떻게 지내든 자기가 행복하길 바랄게."

26년 전 우리는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각자의 길로 떠났다.


2학기 개강 때였다. 친구 녀석과 예쁜 여자가 있는 서클에 가입하기로 작정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미리내 다리 위를 돌아다녔다. 두리번거려도 그닥 마음에 드는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라일락 꽃 내음이 나서 둘러보니 저 멀리 환한 미소를 띤 여학생이 보였다. 그녀가 내 가슴에 선물처럼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저 이 서클에 관심 있는데 가입할 수 있을까요?"

"아 네. 신입생 맞으세요?"

그녀의 온화한 목소리에 정신을 잃었다. 세상 걱정 없는 해맑은 표정을 지닌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오빠만 셋이고 막내인 그녀는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 생일에만 부모님이 케이크를 사서 파티를 했다고 한다. 집안도 넉넉해서 별 어려움 없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그녀에겐 어두운 구석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밝게 자라서였을까? 그녀는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우려 했다. 밝은 표정만큼 마음도 넉넉했다. 나의 썰렁한 농담에도 깔깔거리며 웃어주었고 작은 선물에도 고마워했다.


내 가정환경은 그녀와 정반대였다. 알코올 중독으로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 어머니는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건물 청소부, 파출부, 환경미화원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대학을 다녔지만 빨리 취직해서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이 컸다. 당시 고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을 내가 책임져야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동생들만 아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난 늘 우울했고 불평등한 세상에 불만이 가득했다.


진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려 했지만 우린 어울리지 않는 퍼즐 조각이었다. 철학과 졸업생은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사법고시에 매진했다. 똑똑하고 학점도 좋았던 그녀는 잘 나가는 외국계 기업에 단번에 취직했다. 희영은 도서관에서 고시 준비를 하는 나에게 도시락까지 싸와 격려해 줬다. 2년 연속 1차에서 떨어지자 나는 지쳐갔다. 동생들의 학비 부담과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변함없이 지지해주는 희영도 부담스러웠다.


1993년 12월 10일 겨울 우리는 헤어졌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뺏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별을 원하지 않았지만 내 처지에 더 이상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힘들게 하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만 받고 자랐고, 나는 불행한 가정에서 구박만 받으며 자랐으니까. 우리는 태생부터 달랐다.


혼자 힘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알뜰한 아내를 만나 직장생활 10년 만에 서울에 아파트도 구입했다. 이제는 중산층의 삶을 향유한다.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가끔 골프도 친다. 동생들도 이제 다 졸업하고 어려운 취업 관문을 통과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용돈을 챙겨드린다. 과거 나름나름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현재는 아이가 없어도 고만고만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감사하다.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


오늘 우연히 희영을 보았다. 바로 우리가 헤어진 시청역에서 만났다. 오늘 지하철을 타길 정말 잘했다. 아내가 차를 쓴다고 한 것이 천만다행 아닌가. 그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복잡한 시청역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도 바로 라일락 꽃 내음 덕분이다.


"혹시 김희영씨? 맞죠?"

"어머 민철이? 웬 높임말? 호호. 와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떻게 지냈어? 잘 지내지? 결혼은 했겠지? 흐흐"

"그럼. 벌써 아이가 둘이야. 난 여전해. 직장 즐겁게 다니고 일이 많아도 좋아. 민철이 넌?"

"아 나도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어. 나 A기업에 다녀. 여기 명함 줄게.”


 이건 분명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났을까? 26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그대로다. 그녀는 여전히 행복하고, 젊고, 아름답다. 그때는 그녀를 보내야만 했지만 이제는 보낼 수 없다. 다시 한번 그녀를 놓치면 나는 평생 후회하며 살지 모른다. 사랑한다 희영아. 넌 내 운명이야. 이제 널 보내지 않을 거야.


"희영아, 잠시 시간 되면 차 한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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