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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Sep 14. 2019

추석, 네 며느리들의 반란

열심히 일한 며느리, 제주도 여행 다녀오다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저마다 명절에 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온 가족이 모여 정겹게 대화도 나누고 맛난 음식도 먹는 즐거운 시간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척들 얼굴 보면서 결혼, 취업, 다이어트에 관한 잔소리를 듣는 피하고 싶은 시간이겠죠. 저 같은 며느리는 시댁에 미리 가서 음식 장만하고, 손님 치를 생각에 몇 주 전부터 명절 증후군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혼 후 약 이십 년 동안은 명절에 친정에도 못 가고 시댁 식구를 맞이했어요. 친정이 멀기도 하고 시누이들이 오니 맏며느리로서 손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남편의 주장 때문이기도 했죠.


결혼 후 처음 십여 년 동안은 시댁 식구들이 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갔어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그랬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특히나 힘든 건 명절 때 오는 가족들이 자고 가는 거였어요. 이불을 다 깔아주고, 가고 나면 다 빨아서 정리하고. 명절 음식 장만도 하면서 또 자고 가는 동안 먹을 반찬을 마련하는 게 큰 스트레스였어요. 집안의 모든 그릇을 다 꺼냈다가 정리해서 넣었어요. 제가 못하는 요리를 해야 하니 더 힘들었죠. 언제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 두려웠는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숙박까지는 하지 않더군요.


저는 점점 과감해져서 드디어 올해 사고를 쳤어요. 각자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친구, 네 명의 여자들이 올 추석에 시댁에 가지 않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명절마다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늘 배가 아프도록 부러웠어요. 어쩌면 버킷리스트였는지도 몰라요. "열심히 일한 며느리, 떠나자" 컨셉으로 다녀왔죠. 출발할 때부터 얼마나 신났는지 까르르 웃었답니다. 제주도 가면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어요.


"지금 서울은 몇 시나 되었을까?"

"여기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나?"

"우리 토요일에 귀국하는 거지?"


저는 제주도를 거의 15년 만에 다녀왔어요. 가깝지만, 오지 못한 이유가 주변 사람들이 제주도는 물가가 비싸서 제주도 갈 바엔 동남아를 가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렇다고 동남아 여행을 간 건 아니고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휴가를 즐길 수 없었어요. 정말 큰 결심 했어요. 제주도는 좋은 점이 참 많아요. 국내 여행지이면서 비행기로 이동하니 마치 해외에 오는 기분이고요. 그러면서도 편하게 우리말을 쓸 수 있어요. 음식도 너무 맛나죠. 생각보다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았어요. 친구 중 한 명은 연예인처럼 제주도를 일 년에 서너 번 온다고 하네요. 정말 여유가 된다면 자주 오고 싶어요.


풍성한 여행을 즐기려고 각자가 듣고 싶은 별명을 정했어요. "고급져", "풀향기", "사려니(사려깊은 언니)", "사랑해"라는 별명을 서로 부르며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전 사랑이 고프니 "사랑해"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요. 여행 내내 "사랑해"를 얼마나 들었던지 참 행복했어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여고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죠. 무엇보다 명절에 일하지 않고 자연으로 힐링해서 더 좋았어요. 


백약이 오름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오름을 주로 다녔는데, 따라비(따래비) 오름은 계단이 많아서 고생했지만 내려올때 완만한 능선덕에 여유를 즐겼죠. 물영아리 오름 역시 계단이 많았는데 간격이 촘촘해서 조금은 수월했어요. 오름 정상에 숨겨진 습지는 마치 보물찾기 게임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선물을 찾은 기분이었어요. 빼곡한 삼나무 숲은 아마존 정글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어요. 백약이 오름의 넓은 능선 길은 우리를 포근하게 안아주었어요. 스위스에 가보진 않았지만 다녀온 고급져 친구가 스위스보다 더 좋다고 알려줬어요. 사려니숲도 말로만 많이 들어 궁금했는데 쭉쭉 뻗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숲은 초록초록 했어요. 처음에 포즈를 취하기 쑥스러워하던 친구들은 저와 함께하는 사진 찍기 놀이에 푹 빠졌어요. 맛집 투어와 멋진 카페에서 바다 풍경보기는 덤이었어요.


제주는 가까이에 있고, 늘 마음속으로 다녀오고 싶었는데, 실행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시간이나 돈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마음의 여유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가혹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어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좀 더 소중하게 가꾸면 어떨까요? 저도 이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제주에 다녀올까 해요. 열심히 일한 저를 위한 보상으로 말이죠. 그게 명절이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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