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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Sep 15. 2020

30여년 전 기억을 더듬어

감사한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윤리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요. 매일 선생님 책상에 종이학과 편지를 올렸는데 말이죠. 제가 그랬는지 아셨을까요? 햇볕이 내리쬐던 일요일,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선생님 집 앞에 갔더랬죠. 깜짝 방문하고 싶었는데 미리 약속을 잡지 못하고 갔던 저희가 잘못이었죠.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셨고 연락도 되지 않았어요. 결국 한참을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면서도 뭐가 그리 좋았을까요? 


무뚝뚝하고 감성이라곤 하나도 없던 제가 서울말을 구사하는 선생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야간 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유난히 반짝이는 별에 학금(鶴金)이라는 별명을 붙여 선생님을 그리워했어요. 고고함으로 빛나는 선생님을 흠모했어요. 학창 시절의 무모한 짝사랑이었지만 사랑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죠. 그 마음을 학습으로 승화시켜 성적도 올렸고요. 선생님의 서울말에 끌려 결국 서울 시민이 되었어요. 


신부가 되려다 중도 포기하고 윤리 선생님이 되셨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면서 여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와! 그럼 이루어질 수 있는 거네." 라고 말했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귀여운지. 여고생이 새롭게 부임하는 남자 선생님을 사모하는 건 순정만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죠. 요즘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하네요. 아직도 지방에 계시며 뭇 소녀들을 설레게 하시는지요?



안녕하세요? 불어 선생님


지금은 기억나는 불어가 "사바, 위사바, 주뗌므, 꼬망딸레부, 메르시보끄" 밖에 없네요. 제2 외국어가 대입 시험에 반영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의 열정 덕분에 열심히 공부했어요. 성별이 있는 단어에 관사를 달리 사용해야 하는 불어가 낯설었는데 선생님은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불어 동사 변형도 매번 암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윤리 선생님처럼 불어 선생님도 첫 부임하셨는데 친 언니처럼 다정하셨죠. 구수한 대구사투리가 정겨웠어요.


자취하는 선생님 집에 우루루 놀러 간 기억이 어슴푸레 나요. 뭔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가물가물하지만 아직도 떠오르는 건, 선생님의 밝은 미소 그리고 따뜻한 마음, 친언니 같은 친절함. 전 언니가 없어서 언니 있는 친구가 늘 부러웠어요. 어쩌면 여선생님을 친언니 삼으며 학창 시절을 즐겨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선생님은 어엿한 베테랑 선생님이 되셨겠네요. 불어 공부를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서 혹시라도 길에서 만나면 선생님을 알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죠? 따뜻함과 친절, 열정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수녀 선생님


선생님 과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더운 여름에도 머리에 단정한 베일을, 긴 치마를 입고 단아하게 걸어 다니셨죠. 한때 저도 수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걱정 없이 한 분만을 섬기며 의존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전 바보같이 우직한 구석이 있어서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수녀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할 만큼 존경합니다만.


선생님과 각별히 친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친구가 선생님 전근 가신 학교에 놀러 가자고 해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간 기억이 나요. 경주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정말 선생님을 만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경주라는 장소와 선생님의 얼굴만 오버랩 됩니다.


경주는 저에게 추억의 장소입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 난생처음으로 외국인을 봤어요. 뻔뻔하게 다가가서 "Are you an American?"이라고 물었죠. 배운 영어를 써먹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례한 질문을 던졌는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린아이니까 이해했겠죠? 그리고 선생님을 만나러 친구와 처음으로 단둘이 기차여행을 갔던 곳이죠. 이후 남편과 데이트도 하고 아이들과 추억 확인 여행을 다녀온 장소입니다.


선생님은 아직도 경주에 계실까요? 아니면 은퇴하셨을까요? 저에게 인내와 끈기를 알려주신 선생님. 외유내강의 힘을 보여주신 선생님.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 같아요. 스쳐 지나가는 듯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니까요. 한 학기라는 4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두시간 뵈었을 뿐인데 30년이 지나도 얼굴이 떠오르고 가끔 생각도 납니다. 이렇게 글로 헤아려보니 배운 점도 많네요. 저와의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어디에 계시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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