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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Dec 19. 2021

로맨틱 크리스마스 이브를 꿈꾸며

소설 - 크리스마스 선물

연말이 싫었다. 다들 붕 뜬 마음으로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들떠 있는게 짜증 났다. 결정적으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옆구리가 시렸다. 거리엔 연인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데 늘 혼자 차가운 외로움을 만났다. 호주와 우리나라는 계절이 정반대라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즐긴다는데, 차라리 크리스마스가 여름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크리스마스가 좋았다. 유일하게 부모님에게 공식적인 외박 허락을 받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 위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밤을 샜다. 밤새 서로의 끼를 발산하는 경진대회를 했다. 노래도 부르고, 패션쇼도 하고, 춤도 췄다. 배달 음식을 시켜 푸짐하게 먹었다. 이브날 만큼은 다이어트는 금지어였다. 아이들과 올나이트를 하는 집엔 부모님도 이미 자리를 비워줬기에, 옷이 널브러진 집안에는 치킨과 피자 냄새로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친구 집을 청소하는 것조차 즐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크리스마스를 피하고 싶었다. 연말이 되면 회사에서는 종무식을 하기에 일도 많이 줄었다. 자주하던 야근도 안 하니 수월하지만 외로움이 밀려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 되면 동료들이 6시도 되기 전에 퇴근하기에 혼자 멍하니 사무실을 지켰다. 거리에 나가기도 두려웠고 사무실에 남아있기도 창피했다.


다행히 올해 남친이 생겼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에 12월 1일부터 카운트다운을 했다. 만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처음 맞는 기념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당당히 5시에 나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조금 쌀쌀하지만 추억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 평생 바지만 입었는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부츠를 당장 사기도 애매해서 레깅스를 입었더니 치마속으로 찬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시계가 5시를 가리키자 한두 명 씩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나갔다. 나도 질세라 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에게 줄 명함 지갑이 담긴 쇼핑백을 챙겼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엔 벌써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잔잔히 들려오는 캐럴 소리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6시 홍대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버스를 타면 막힐 것 같아 지하철을 이용했다. 5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평소 출퇴근 시간보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홍대까지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이나 걸렸다. 서울 사람 다 나온 줄 알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니 그럴 만도 했다.


시계를 보니 5시 50분. 밀당도 못하는 나는 늘 그와의 데이트에 항상 먼저 나갔다. 이번이 네 번째이긴 했지만. 좀 지각도 해줘야 하는데 성격상 약속시각 전에 나가야 마음이 편하니... 이것도 내 복이려니 생각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연인들의 표정을 쳐다봤다. 모두 솜사탕을 입에 한껏 넣은 듯 달콤함이 넘쳤다.


6시가 되었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막히나 보다 생각했다. 조금 늦으면 카톡이라도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서운했다가 금세 오겠거니 여겼다. 점점 더 많은 인파가 오갔다. 혹시 치마를 입은 나를 못 찾는 걸까? 설마, 못 찾으면 전화를 했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6시 10분. 시간이 지날수록 자존심은 곤두박질 쳤다. 설마 나를 바람맞히는 걸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고민됐다. 먼저 전화나 카톡을 보내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아닐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딱 30분까지만, 그러고도 연락이 없으면?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손도 시렸고 다리도 후덜거렸다.


6시 30분. 그랬구나. 나만 좋아했던 거구나. 나만 바보였구나. 혼자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신났구나. 포장한 선물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혹시나 놓쳤을 까봐 스마트폰을 봤지만 문자도, 카톡도,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먼저 전화하는 것조차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을 보내어야 할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하철로 터벅터벅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기적처럼 그가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웬 산적처럼 생긴 남자와 함께 뛰어왔다.


"아, 다행이다. 혹시... 갔으면 어쩌나 정말 걱정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헉헉"

"네 전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앗... 저기 잠깐만요. 제가... 늦어서 정말 미안한데요, 사정이 있었어요. 버스가 너무 막혀서 중간에 친구와 시청에서 여기까지 뛰어왔어요. 중간에... 전화할 틈도 없이 달려왔어요."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 말하는 그를 용서해야 할지, 친구는 왜 데리고 온 건지, 도대체 크리스마스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나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 친구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데 오늘 인영 씨 만난다고 하니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어요. 제발 화 푸세요. 버스가 그렇게 막힐지 진짜 몰랐어요."


대책 없는 이 남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친구와 재롱잔치 하며 올나잇을 하듯 우리 셋도 연인과 한 명의 남자친구가 아닌 학창 시절 세 친구가 만난 것처럼. 나의 로맨틱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남사친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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