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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Aug 31. 2018

용어가 주는 위안

가스라이팅 (Gaslighting)

용어 하나가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면 나에게는 "가스라이팅"이 그랬다. 가스라이팅은 답답한 내 상황을 설명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것이다. 거부, 반박, 전환, 경시, 망각, 부인 등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에 대한 통제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S는 몇 안 되는 우리 팀에서 가장 활발하고 유쾌한 동료였다. 능력은 있지만 성실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항상 일보다는 노는 것,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땡땡이 치기 일수였다. 팀이 모이면 재미있는 분위기를 담당했고 활달한 동료였다. 팀장 위에 부사장이 낙하산으로 들어오면서 팀 분위기는 이상해 졌다. 기존의 팀원 대부분이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퇴사하고 새로운 팀원들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S는 신규 부사장의 신임을 얻었고, 기존 팀장은 비자발적으로 나가야만 했다. 결국 S가 나간 팀장의 자리를 맡았다. 


팀장이 되기 전 S를 아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는 S가 성실하지는 않지만 실력자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같은 동료에서 승진한 팀장이어서 무엇보다 편하고 좋았다. S가 승진한 지 얼마 안 되어 S의 친구들과 함께 뉴욕의 아파트를 빌려 3박 4일 동안 관광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S가 승진하기 전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나는 S가 업무적으로는 팀장이지만, 그래도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였기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친구로 생각했다. S는 우리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이 여행을 추억하기 위해 나에게만 사진집을 제작해 주기까지 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리고는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거의 1년간 S는 나를 괴롭혔다. 가스라이팅처럼, 내가 무능력하다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했다. 


"내가 친구니까 너를 위해서 이야기해주는 건데, 부사장이 너를 싫어해. 넌 찍혔어. 그러니 다른 데를 알아봐. 넌 여기서 비전이 없어. 넌 여기 있으면 절대 승진할 수 없어. 너는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절대 잘될 수 없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팀장이라면 부족한 경험이 무엇이지, 그것을 어떻게 채울지,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마치 "난 너를 당장 자르고 싶어. 그런데 마땅한 근거가 없으니 제발 네가 알아서 나가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런 메시지를 1년 정도 듣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정말 무능력한 사람은 아닐까? 내가 정말 이 조직에 도움도 안 되고, 맞지 않는 사람은 아닐까?' 


스스로 내 능력을 의심하면서 S의 지배력 밑에서 놀아났다. 


이런 나의 고민과 스트레스에 대해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들었다. 여러 가능성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욕 여행에서 너무 만만하게 대한 것은 아냐?"

"동료에서 팀장이 되다 보니 자격지심이지 않을까?"

"어쩌면 너의 능력을 질투하는지도 몰라."

"아무리 전에는 동료였더라도 이제는 팀장이니 납작 엎드려 모셔야지."


그러고 보니 한때 S는 내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S를 팀장이라기보다는 팀원처럼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를 만회해 보려고 개인적으로 비싼 선물을 해보고 감언이설도 해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 단어의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가스라이팅'의 의미에 견주어 S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같은 수준의 팀원이 아닌 능력 있는 팀장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팀장은 내가 나가길 원하기 때문에 나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야. 나는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왜 이런 구박을 받으면서 이 회사에 다녀야 하는 거지? 나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오기와 간절함이 생겨났다. 덕분에 용기를 내어 여러 곳에 지원하고 면접도 보았다. 한 곳에서 2시간 넘게 영혼이 털릴 정도로 면접을 보고 나니 자신감도 생겼다. 여러 곳을 알아보았으나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의 성향과 경력에 맞는 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아 이직하게 되었다. 이직에 성공하게 되면 S의 얼굴에 사직서를 던지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난 마음이 약해서 그렇게 못했다. 사실대로 어느 회사에 가는지 말했는데 내가 좋은 회사로 가는 것에 대해 약간 놀라는 듯했다. 퇴사한 이후에도 내가 먼저는 아니지만 S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S가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면 도와준다. 내 마음은 아니지만 겉으로는 아직도 친구다.  


지금 회사에서 나는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내 능력보다 더 많이 인정받는 기분이다. 지금 회사의 팀장은 S와 정반대로 나와 함께 고민하고, 칭찬도 많이 하고, 조언도 한다. 현재의 좋은 직장과 동료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최근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고 답한다. 친구들은 내가 S에게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잘 참았기 때문에 지금의 좋은 상황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S는 비록 나를 많이 괴롭혔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S가 고맙다. S는 나의 스승이다. 내가 전 직장에서 안주하지 않도록 자극을 주었고, 생각지도 못한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S의 가스라이팅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전 직장에서 내가 퇴사한다고 팀 전체에 메일을 보냈을 때, 나를 그렇게도 싫어했다던 부사장이 개인적으로 회신을 하면서 "이직을 너무나 축하한다. 너의 헌신과 노력을 진심으로 감사한다."라고 했다. 


"정말 부사장이 나를 미워하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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