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분열의 위기인가, 통합의 기회일까
[BGM] 짙은(Zitten)-향_영화 폭풍의 언덕 중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 에밀리 브론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 사회규범, 그리고 그 안의 또다른 개인들 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그 과정에서 적절한 가면을 찾아 씁니다. 가면이라는 뜻을 가진 페르소나는 우리가 가진 일종의 공적 얼굴로서 ‘사회화’를 위한 화장인 동시에 우리 개개인성에 대한 억압, 통제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억압이 너무 강할 경우 혹은 더 이상 그 억압을 견디기 힘들 경우 우리는 또다른 가면을 써서 묶여 있는 또다른 나를 표출하려 시도합니다. 오래된 수퍼 히어로의 서사는 대표적으로 우리가 사실상 멀티 페르소나를 갈구하고, 또 소비해왔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단지 과거에는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다 여기고 쉬쉬해왔다면 현 시대의 디지털, 소셜미디어 기술은 멀티 페르소나가 금기의 영역을 넘어 자연스레 사회적 주류로 부상할 수 있는 판을 깔았습니다. 이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정, 직장에서의 페르소나를 떨치고 전혀 다른 가면을 가지고 브런치, 유투브, 인스타그램 등에서 또다른 ‘나’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전부터 있었지만 터부시 됐던 것이 사회문화의 주류로 범람하면서 멀티 페르소나 문화는 이제 더욱 과감히 확산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활동과도 맞닿아 있어 긱 이코노미(Gig Economy), 멀티 커리어리즘(multi-careerism) 현상의 확산도 촉진할 것입니다. 개개인이 하나의 직업, 하나의 직장으로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멀티 페르소나를 가지고 다양한 부업, 멀티 커리어를 시도하고 추구하는 것 역시 차츰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입니다. 다만, 멀티 페르소나의 범람은 필연적으로 부작용도 낳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창조한 다양한 가면에 우리의 인격과 정체성을 지배당해 자아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실제 긱 이코노미 속 노동자들은 다양한 물리적인 멀티 태스킹보다 일관된 자아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토로합니다. SNS를 통한 자기과시적 나르시시즘, 그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타인, 타집단에 대한 익명성의 혐오, N번방 사건 등과 같은 잔인한 사이버 범죄는 멀티 페르소나가 변질되었을 때의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지금의 시대를 디지털 기술의 시대 이면에 불안의 시대라 규정합니다. 높은 불확실성이 불안정성을 낳고 이는 불안의 정서를 낳습니다. 나르시시즘과 혐오문화는 불안으로 인해 자기가치감이 무너진 상황에서 표출되는 자아 분열적인 자기방어 증상입니다.*
우리가 자칫 오해해서는 안되고 명확히 알아차려야 할 점은 페르소나가 곧 우리의 인격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페르소나가 우리의 인격, 정체성의 일부를 겉으로 드러내 전체인듯 위장하는 ‘가면’이라면 우리의 인격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 본질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카를 융은 이를 ‘정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해 다채로우면서도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전인격, 즉 자기실현을 향해 발달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금기를 넘어 자연스럽게 ‘가면’을 바꾸어 쓸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다시 우리의 몫입니다.
여기 조금 다른 시각에서 멀티 페르소나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죠. 1843년 영국, 한 재능 있는 여성이 당대 유명 시인, 전기작가에게 시를 몇편 보냅니다. 자신이 지은 시에 대해 피드백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허탈했습니다.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여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별이 문학작가의 장벽이 되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꿈꾸고, 또 재능이 있었던 두 여동생과 의기투합해 '벨'이라는 페르소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매가 아닌 '벨' 형제로 시집을 출간합니다.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 시집의 판매량은 저조했지만 출판계는 벨 형제를 주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847년, 그들은 벨이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소설이 시장의 인정을 받는 시기는 각각 달랐지만 그들의 소설은 이후 영국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짐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맏언니 샬럿 브론테는 커러벨이라는 이름으로 제인에어를, 둘째 동생 에밀리 브론테는 엘리스 벨이라는 이름으로 폭풍의 언덕을, 셋째 동생 앤 브론테는 액턴 벨이라는 이름으로 아그네스 그레이, 와일드펠의 소작인이라는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당시 영국사회는 여왕이 통치했지만,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여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당대 사회상은 실제 여성의 정체성, 욕구, 삶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이를 감수하는 무색무취의 '페르소나'를 썼지만 이 괴리를 주체적으로 뛰어넘고 싶었던 브론테 자매는 '벨'이라는 또다른 페르소나를 활용해 자신의 진정한 열정, 주체적 인격을 표출했습니다.**
다시 오늘, 2020년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TV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부캐’, ‘유산슬’, ‘유두래곤’에 기분좋게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한 캐릭터의 변주 속에서도 유재석이라는 일관된 인격을 재차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 미디어 규범에 억눌려 시도하지 못한 실험을 ‘부캐’라는 놀이를 통해 발산하며 즐기고 때로는 감격하는 모습을 전달하는 과정은 한 사람의 인격/정체성이 건강하게 통합되는 과정에 대한 은유입니다. 부캐, 멀티페르소나 시대가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켠으로 매우 반가운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의 전인격을 되찾고 통합하기 위한 도구이자 기회로 멀티 페르소나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멀티 페르소나가 되돌리기 힘든 현상이라면 우리는 이를 인격의 분열보다는 통합을 위한 도구로 활용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적 사유에 기반한 자기성찰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격, 정체성과 가면을 분리해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격/정체성은 본질이요, 가면은 수단입니다. 그간 비정상적으로 억눌려 찌그러져 있던 인격의 한 단면을 또다른 페르소나를 활용해 건강히 피고 전인격을 향한다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관점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페르소나가 아닌 ‘전인격’에 초점을 맞춰 관심을 갖고 공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우리가 나 자신을 포함한 서로의 전인격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문화를 추구하고 또 그리 될 때 비로소 멀티 페르소나는 제 역할을 다했다, 사그라들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 현대 사회학에 따르면 여러 불안요인에서 사람들은 외부에서 동원되는 한 보호 방식을 통해 안위를 얻고자 하는데, 신념과 느낌, 사고와 행동의 급진화라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급진화 현상에서 다양한 의견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은 절대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감정과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고립된 커뮤니티를 형성, 자기집단에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며 의견이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협상, 타협을 엄격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부분의 현상이 '실명/겉으로 드러난 공식 페르소나'보다는 익명성이 담보된 네트워크 상의 제2, 제3의 페르소나를 통해 나타납니다.
**세 자매 중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는 안타깝게도 소설 출간 이후 몇 해가 되지 않아 질병으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의 첫 소설이자 유작 [폭풍의 언덕]이 재평가를 받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언니 셜롯 브론테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정신'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다행히 그녀의 사망 이후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재평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평론했습니다. "거대한 무질서로 분열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자기 내면에서 느낀 여성의 거대한 야심". 폭풍의 언덕은 현재까지도 세계 문학사에서 반드시 읽어야할 걸작에 손꼽히는 획기적인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
*2020트렌드코리아 키워드 '멀티페르소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기고문 원문입니다. w/출판사 미래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