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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Jun 07. 2020

[미래의 창_독자편지] 판데믹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목표와 성실, 연대와 디테일이 낳는 더 나음(better)의 순환고리

[BGM] Paolo Nutini - Iron Sky

1940년대 후반, 북아프리가 알레리의 소도시 오랑에 전염병이 찾아왔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 계단 통로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재앙의 서막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은 쥐들의 수는 늘어났다. 4월 25일 하루동안 6231마리가 수거, 소각되었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는 순간. 똑 같은 일들이 인간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염의 원인도 제대로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었다. 4월에 시작된 전염병은 가을이 되자 도시 전체로 퍼졌다. 재앙으로 감염된 도시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원인모를 전염병에 대응해야 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담긴 어떤 구절입니다. 초기, 등장인물의 대응방식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관념적 담론가, 선동가’ 유형입니다. 그 전형은 파늘루 신부입니다. 신부는 성당 미사에서 전염병이 신의 ‘징벌’임을 역설하면서 인간이 비로소 ‘회개’할 때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거대하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기자 랑베르로 상징되는 ‘도피적 관망자’ 유형입니다. 그는 오랑에서 일어난 사태가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길을 백방으로 모색합니다.


세번째는 의사 리유와 타루로 대변되는 ‘이타적 현실주의자’ 유형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보다 공동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발생한 문제에 끊임없이 직면해 전염의 원인에 대한 추적과 치료를 반복합니다.   


마지막 네번째는 ‘명명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 대변되는 ‘두려움  갈대유형입니다. 이들은 전염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 자기 주체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고 주변의 프로파간다, 눈앞에 보이는 사건, 상황에 휩쓸려 우왕좌왕합니다.

.. 1~2년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4 산업혁명'이라는 '대유행', 그리고  대유행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대응방향성을 논하고자 소설 '페스트' 비유를 빌려온 적이 있습니다.  전환시대,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변화'라는 속성을 '질병' 비유해 동일하게 비유한적도 있었습니다. (관련해서는 이전  '전환시대의 조직, 그리고 문화', 그리고 저서 '네이키드 애자일' 참고 부탁드립니다.


http://mobile.kyobobook.co.kr/showcase/book/KOR/9788959896226


 공교롭게도 이번엔 정말 직접적인 '질병으로 인한 대유행, 공포'로서의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태 한 가운데에서 한 사회, 그리고 기업의 구성원으로서 다시한 번 소설 '페스트'의 등장인물을 바라봅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이번 감염병을 '마귀의 짓'이라고 설교합니다. 또다른 누군가는 감염예방과 집단예배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신'을 볼모로 정치/종교 집회를 선동합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감염의 차단과 예방, 치료라는 현실적인 필요에 그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집단 감염과 사회적 공포, 불신이라는 부작용만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나타난 '관념적 담론/선동가'는 오히려 '파늘루 신부'보다 더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 속 파늘루 신부는 이내 본래의 태도를 버리고 온전하고 정직하게 질병을 대면하고, 현실적 구원을 위해 헌신했지만 현실 속 파늘루는 이 국면이 끝날때까지 과연 스스로 깨닫고 변화할 수 있을지.. 아직은 요원해 보입니다.

 감염병 초기 많은 국가 및 리더, 구성원이 취한 태도는 '도피적 관망자' 유형이기도 했습니다. 특정 지역에서 발발해 마치 그 안에서만 끝날 것이고 또 끝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많은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그런 인식 속에서 상당한 국내 여론은 중국인에 대한 입국을 철저히 차단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또 상당수는 감염이 발발한 지역을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유사한 인식에 기반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실제 타국으로부터 접근을 차단 당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예상치 못하게 기습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나라가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감염발발 초기부터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감염이 초기 확산된 일부 국가, 지역을 강하게 비난하거나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그 비난과 비하의 대상에는 감염초기에는 분명 우리나라도 들어 있었습니다. 많은 누군가는 감염을 피한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럽으로 소위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머지않아 이 역시 옳은 예측과 대처방식은 아니었다는 것이 매우 가시적인 통계적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탈출했던 누군가가 탈출이 탈출이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는 불과 며칠, 몇주가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또 우리 대부분은 ‘두려움 속 갈대’ 유형이기도 합니다. 전염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가짜뉴스를 생산하거나 혹은 수이 사실로 수용해버립니다.


[가짜뉴스의 한 예]

COVID-19는 감염의 증상, 기침과 열과 같은 증상이 보여 병원에 갈 때에는 폐의 50%는 이미 섬유증입니다. 즉 증상이 나타나고 병원에 가면 늦다는 것입니다.대만 전문가들은 매일 아침 스스로 할 수 있는 간단 진료를 제시했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10초 이상 숨을 참으세요. 기침, 불편함, 답답함 없이 완료하면 폐에 섬유증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좋은 공기에서 매일 아침 자기 진료를 해주세요. 또 일본 의사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대할 매우 유용한 충고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입과 목을 항상 물로 적시고 절대로 건조하게 두면 안됩니다. 15분마다 물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바이러스가 입으로 들어가더라도 물 또는 다른 음료를 마시면 바이러스가 식도를 타고 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가 위에 들어가면 위산에 의해 바이러스가 죽게 됩니다.
물을 자주 마시지 않는 경우에는 바이러스가 기관(폐로 통하는 숨길)을 통해 폐로 들어가게 되어 매우 위험해 집니다.

*우리 중에는 분명 숨을 들이쉬고 10초동안 참아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불안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고 주변의 프로파간다, 눈앞에 보이는 사건, 상황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다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가짜뉴스와 '혐오'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명명’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로 대변되는 ‘두려움 속 갈대’ 유형이 어쩌면 가장 위험히 발현되는 지점입니다. 어떤 우리는 우한, 중국인을 혐오했고 그러다 대구를, 나아가 동성애를 혐오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미주/유럽인은 우리 한국인, 나아가 아시아인을 혐오했습니다. 혹시나 감염될까 귀국을 혐오했던 어떤 유학생은 그 짧은 시간 내 마음이 바뀌어 어떻게든 귀국하기 위해 다시 안간힘을 쓰기도 했을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커질때 불안이 커지고, 다시 그 불안은 혐오와 같은 급진적이고 광신적인 태도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파괴하는 원인으로 자기(혹은 자신이 속한 내집단) 바깥의 특정 대상을 지목한 후, 거기에 불안을 대체할 분노와 복수심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일련의 이슈가 현대 사회에서 좀 더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현대 정치/사회의 주류 시스템, 혹은 지도자가 매우 공식적이고 직설적으로 '혐오' 프레임을 이용, 선동할 때, 기술의 발전이 그 확산과 유행을 강력히 지원하는 형세가 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카지 미슈라는 그의 저서 '분노의 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 2016년의 브렉시트와 미국 대통령 선거로 인한 충격파에서, 한나 아렌트가 1968년 말했듯이 <역사상 처음으로 지상의 모든 인간이 공통된 현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모든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와 거의 인접한 이웃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에도 영향을 받는다>....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부터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프랑스의 마린 르 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까지 온갖 유형의 선동가들은 냉소와 지루함,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민심을 이용했다... 이민자와 소수집단, 그리고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타자>에 대한 혐오가 어느덧 대세가 되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라는 원칙하에 탈나치 정치와 문화가 정립된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증오와 악의로 가득한 말로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통적 미디어에서는 물론이고 새로운 미디어에서도 흔한 장면이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말그대로 매우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질병'의 발발과 확산, 그리고 대응의 과정은 그 자체가 참으로 영화적이기에 우리가 별다른 고차원적 노력을 하지 않아도. 소설 페스트 등장인물을 대입해 비유해 보기에. 혹은 저 '분노의 시대'의 한 대목을 그대로 우리 일상에 비추어 보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되면 우리는 차마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념적인 담론에 기댄 선동이, 관망적인 도피가, 두려움과 불안 그로인한 무차별적 혐오가. 지금 우리가 이 시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태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다시 소설 페스트로 돌아가봅니다. '이타적 현실주의자'로 대변되는 소설 속 리유, 그리고 타루는 수퍼 히어로가 아닙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사실 리유와 타루는 페스트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꾸렸던 보건대에서 (늙은 의사 카스텔이 개발한) 치료제가 될까 희망을 품었던 새로운 혈청마저 실패로 돌아갑니다. 전염병은 그 끝무렵 타루라는 헌신적 인간을 하늘로 데려가기까지 합니다. 소설 속 페스트는 결국 소멸했지만, 이유없이 창궐한 것처럼 소멸 역시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허무하고 무기력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또 한켠으론 지금 우리 상황과 오버랩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이기에.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강력한 전염병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더욱 진지하게 곱씹어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페스트의 은유를 빌려 여러분과 함께 논의해보고 싶은 '삶/조직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가치있는 목적과 실험가능한 목표를]


 페스트 소설 주인공이 다른 일반 군중과 달랐던 가장 큰 차이점은 페스트라는 공포스러운 유행성 질병에 온전히 맞서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삶의 그 어떠함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신 뇌과학, 의학, 조직/경영, 사회과학 이론 역시 뚜렷한 목적/확신이 조직과 개인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동기를 근본적으로 자극하는 핵심요소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목적, 이유는  '막연히 그저 잘되겠지', '이건 무조건 잘되어야만 해'라는 것처럼 막연하거나 단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체코 출신의 극작가 바츨라프 하펠의 입을 빌려 말씀드리자면, "희망은 어떻게든 잘 될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어떻게든 가치가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그게 잘되는 말든 상관없이."


 리유, 타루는 페스트를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고통속에 죽어가는 또다른 동료로서의 인간을 운명론에 기대어 방치할 수 없었기에, 나아가 이미 정해진 한계/실패라 하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투쟁하는 것이 부조리한 세계를 창조한 '신'마저도 바라는 가치있는 행동이라 믿고 목적을 향했습니다.


 하나 더, '가치있는 목적'은 구체적인 목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목적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루고자 한 결과라면 구체적인 목표는 그 결과(목적)를 낳을 수 있는 현실에서 실험/검증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고 행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페스트 극복'이 목적이라면 리유의 동료의사 카스텔이 수행한 '혈청'치료는 그들이 현실적으로 설정한 '실험가능한 목표'입니다. 조직/경영에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목표관리 방식 'OKR(Objective-Key Result' 역시 정확히 이러한 철학과 원리를 따릅니다.

 목적과 목표는 막연한 희망을 강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는 인식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두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움츠려들거나 도망치지 않고 최소한이나마 우리에게 남은 여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입니다.


[둘, 포기하지 않는, 나아가 전략이 수반된 성실을]


 앞서 제시한 가치있는 목적, 그리고 실험 가능한 목표를 관통하는 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무조건 '해피엔딩'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페스트 극복을 위한 구체적 목표였던 '혈청'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소설 페스트 말미 페스트는 사라졌지만, 말그대로 사라진 것이지 리유, 타루의 보건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타루는 페스트가 소멸되기 직전, 질병에 의해 희생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목표, 행동이 결코 헛되고 허무하고 허망한 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소설 페스트를 통해 작가 카뮈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 그리고 우리가 동감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실존적 태도, 성실성에 있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


 다만, 이 성실성에 대해서 역시 우리는 '막연함'과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성실성은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과 맞닿아 있습니다. 캐럴드웩 스탠포드 심리학 교수에 따르면 '삶에 대한 태도'인 우리의 마인드셋은 고정마인드셋(Fixed Mindset)과 성장마인드셋(Growth Mindset)으로 나뉩니다. 고정마인드셋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반면 성장 마인드셋은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이 관념의 차이에서 우리는 불확실성, 변동성 높은 그리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한 시대에 필요한 바람직한 '성실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최선을 다하고 배우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찾는다.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타인을 정복하려는 함정에서 벗어난다)

 2. 실수와 실패에서 좌절감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극제로 삼는다.

    (그 때문에 실패 앞에서 초연하고, 이를 인정하고 공감을 구하며 다시 시도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3. 성공, 성장을 위한 '전략'과 프로세스를 관리한다.

    (실패를 딛고 다시 시도할 때 어떤 시도가 통하고 통하지 않았는지, 어떤 전략/전술이 유효한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실험하고 개선한다.)

 4. 1~3을 기반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근성(Grit)을 가지고 있으며, 이마저도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캐롤드웩 교수는 진정한 성장 마인드셋, 그에 비롯한 성실성(노력)은 목표에 다가서는 자신만의 구체적 전략과 프로세스를 창조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다시말해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자신이 취한 전략, 행동, 사고를 바꾸지 않고 동일한 행동을 끈질기게 무한 반복하는 것은 참된 성실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성실성은 행동의 근성을 넘어서 '사고'의 성실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 생각과 긴장이 필요합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


 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 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한나 아렌트-


[셋,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과 협력을]


 알베르 카뮈가 활동하던 시기(20세기 초중반), 시대를 둘러싼 학문, 이론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주류 학문이 가정한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였습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은 충분히 합리적인 행위자다.

2. 인간은 완벽한 정보를 소유한다.

3. 인간은 주관적인 효용성을 극대화한다.

4. 인간은 다양한 행위에 따르는 비용과 혜택을 저울질한다.

5. 그런 다음 비용 대비 최고의 이익을 주는 것을 고른다.


 사실 이 같은 가정은 현실에서 온전히 작동하기 힘든 '허상'에 가까웠습니다. 완전한 인간을 가정하고,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인간의 행위가 가능한 한 '변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의 '인간다움'을 최대한 지우고 기계처럼 표준화하고 평균화해 채찍질하는 당시, 그리고 현재의 조직/경영 이론에서, 현실적인 인간의 미덕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 채찍을 쥘 수 있는 '수퍼스타'가 되든지, 인간성을 지우고 철저히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든지.


 과학, 이성을 내세워 찬란한 미래를 말하던 산업혁명 시기, 인류는 동시에 대 전쟁(제 1, 2차 세계대전)과 대 공황이라는 부조리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인간의 삶, 사회는 불완전함의 연속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책이나 이론 안에서 끼워맞춰져 본말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실제 현실 세계 속에서 실재하는 상황을 직면한 채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코로나 이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우리의 삶을, 그리고 조직을 경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냉정한 현실은 수퍼스타, 순종하는 무색무취의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으로 행위하면 자연적으로 사회/정치/경제적 선이 달성된다는 고전 경제/경영학적인 가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분명한 것은 20세기보다 복잡, 불확실성이 훨씬 더 높은 지금 우리의 시대는 더더욱 그렇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우리 스스로가 불완전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연대하는 것입니다. 리유와 타루가 실패,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면서도 '보건대'를 통해 가치있는 목적과 목표, 그를 향한 지독한 성실성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것 처럼 말이지요. 극의 초반 ‘관념적 담론가, 선동가’ 파늘루 신부도, '도피적 관망자' 기자 랑베르도 '연대'의 힘을 통해 완전한 방향으로 향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것은 협력이다.'라 주장했습니다. '연대, 협력'의 힘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와튼 스쿨 교수 아담 그랜트는 조직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수퍼스타'가 아니라 '기버(Giver)'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조직의 생산성을 이끄는 인재는 자신의 분야에 정통하면서도 이타심을 바탕으로 조직 내외부와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가능한 사람,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 자신을 연계시킬 수 있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연대하는 인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높은 책임감과 능동성을 바탕으로 탁월함을 추구한다.

2. 가치와 과정을 중시한다.

3. 안정적인 자존감을 바탕으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4. 겸손하고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으며 진솔하게 소통한다.(앞뒤가 다르지 않다.)

5.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애쓰고, 이와 관련한 책임편향 - 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에게 공헌하는 정도를 부풀리는 경향-을 극복할 줄 안다.

6. 자기 직무에 대한 전문성과 스스로에 대한 눈높이에 견주어 타인이나 타 직무를 예단하지 않는다.

7. 이타적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과 동료를 돕고자 한다.

8. 동시에 높고 신중한 안목을 바탕으로 조직 내 이기주의자, Free Rider를 분별하고 대응할 줄 알며 이타심이 자칫 자신을 갉아먹지 않을 정도로 자기를 관리하는 전략을 갖는다.

9. 관계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고 주변을 빛냄으로써 전체를 빛나게 하려고 한다.(승리를 독식하지 않고 공유한다.)



[넷, 비로소 '더 나음(better)'을 낳는 일상의 디테일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디테일'에 관한 것입니다. 혹여 앞서 제시한 일련의 내용에 공감하시는 독자가 계시더라도 분명한 진실은 현실과 그 현실에 마주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삶을, 조직을 영위함에 있어 수없이 가치충돌에 맞닥뜨립니다. 가치는 당장의 이익 앞에서, 용기는 눈앞의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의지는 강력한 습관 앞에서, 때로는 미처 생각하고 어쩌고할 틈도 없이 우리는 분명히 하루에도 몇번씩 무너지고 넘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태도는 바로 이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판데믹, 거대한 변화에 대처하는 태도, 그 시작은 오늘의 일상, 일상 속 디테일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우리 개인은, 그리고 조직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매력넘치는 다양한 포부와 가치체계를 표방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노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또 실천해야 할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품은 목적에 대한 목표, 그에 비롯한 전략과 프로세스, 협력과 연대의 길은 광활한 우리의 무의식, 상상 속 유토피아, 노트, 이 브런치, 혹은 또다른 SNS에 있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진짜 삶, 문화를 규정짓는 일상의 작은 가치출될 상황에 대해 책임 있고 확률적으로 일관된 대답을 할 수 있는 태도와 역량을 갖추는 것이 아닐까요.

 의미있는 변화는 오늘의 일상에서 수없이 맞닥뜨리는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을 어떤 태도로 다루고 의사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우리 스스로 내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응답의 수준이 곧 우리 각자가 사는 세계의 '결'과 '질'을 결정합니다. 그런면에서 '더 나음(better)'의 순환고리는 결국 일상의 디테일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소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시대는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요, 지혜의 시대이자 우매의 시대의며,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입니다. 우리는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 속에 살면서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서 참된 위안을 갈구합니다. 모순이 격화되는 이 시대, 우리의 시선과 에너지를 바깥에 두기보다 우리 내면, 태도(Attitude)에 좀 더 쏟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무게중심의 이동으로 인해 우리의 시절, 시대, 봄/겨울은 비로소 재정의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고 정의한 방식대로.

감사합니다.
 

상효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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