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나의 작고 귀여운 아이폰을 봤다 덮었다 한다. 에잇 잠이나 자야지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덮고, 이불도 덮고 가습기를 켠 뒤에 눈을 감는다. 10분은 지났을까. 결국 다시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화면 위로 보이는 12:02.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은 2월 10일 나의 생일이다. 이번 생일은 좀 어른스럽게 넘어가야지, 괜히 두근거리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역시나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생일이 되었다고 해서 하늘에서 선물이 뚝 하고 떨어지는 것도, 갑자기 어디선가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오는 것도 아니지만 생일은 언제나 설렌다. 생일이 있기에 내 삶이 있고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눈만 말똥말똥 뜬 채로 18살의 생일을 생각한다. 생일 전날에 가족끼리 미리 생일을 축하하며 와인을 한잔씩 마셨다. 그 덕에 나는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 들어버렸다. 생일의 12시를 맞이하지 못해서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생일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생일이 되면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오고, 그러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축하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만큼 축하를 받지 못하면 실망하곤 했다. 얼마나 축하를 많이 받는지가 내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내가 굉장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생일이란 설레고도 두려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나는 18년 인생 중에서 가장 많은 축하를 받았다. 점심에는 교회에서 생크림 케이크 위의 초를 불고, 저녁에는 집까지 몰래 찾아온 친구들과 함께 초코케이크 위의 초를 불었다. 생일 케이크가 두 개라니. 나도 그렇게 축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기왕이면 매년 나의 생일이 그러기를 바랐다.
23살의 생일을 맞이하자마자 왜 18살의 생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때 먹었던 케이크의 모양과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날 찍었던 동영상과, 마주했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나는 알바에 가야 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인 동시에 설이기도 하고 내가 일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시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언제나 공존하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매장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미리 일하고 있는 영비가 보인다. 나는 영비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말한다.
"언니!! 나 오늘 생일이야~!~!"
누군가가 내 생일을 먼저 축하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생일을 밝히는 일은 흔치 않다. 괜한 TMI를 남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일어난다. 나는 영비가 좋고. 영비에게 축하를 받고 싶고. 영비는 아마 진심을 담아 축하해 줄 테다. 내 말을 들은 영비는 눈을 크게 뜨며 왠지 오늘 너무 예쁘게 입고 왔더라며,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본다.
"나는 언니 팔 한쪽 아니면 다리 한쪽? 그거 아니면 필요 없어."
"오....지금이라도 썰어갈래? 근데 별로 쓸모없을 거야."
그럼 나는 진지하게 언니의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을 자르는 시늉을 한다. 우리 대화의 8할은 이런 식이다. 나는 이런 영비와 뇌 빼고 나누는 대화가 좋다. 당연히 농담인 말이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건네고, 듣는 사람도 진지하게 듣는다. 그리고 진지하게 답한다. 쓸데없는 일에 진지할 수 있고, 아주 무겁고 진지한 일도 가볍게 지나칠 수 있음을 나는 우리의 대화를 통해 배운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는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조금 뒤에 화장실을 다녀오니 어느새 서클님도 매장에 와있다. 나를 보자마자 장치 하나가 고장난 것 같다며 나를 테마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곳에는 어두운 테마 방을 밝히고 있는 케이크 하나와 동영상을 찍고 있는 영비가 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둘은 생일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준다. 순간 어리둥절해진 나와 그런 나의 반응이 성공적이라는 듯 웃고 있는 영비와 서클님. 나는 나의 기쁨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진짜....진짜...너무 좋다...!!!! 너무 감동이야!!! 나 이런 거 너무 좋아…. 으ㅏ아아아아 고마워!!!"우리는 신나게 사진을 찍고, 케이크와 단둘이 찍고, 영비와 나와 서클님과 케이크 넷이서도 찍고, 영비와 나와 케이크 셋이서도 찍고, 케이크 단독 샷도 찍어준다. 그 순간 내 얼굴이 잘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굴이 보름달처럼 나왔다면 그건 그 만큼 행복했다는 뜻일 테고, 마구 찌그러져 있다면 그만큼 활짝 웃었다는 뜻일 테다. 사진 속에는 어느 때보다 생생한 나의 모습이 담겨있다. 오랜만에 사진이 사진의 역할을 한다.
일하는 내내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락이 온다. 친구에게, 가족에게, 선배에게 축하를 받는다. 축하와 함께 선물도 받는다. 선물을 받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길고 짧은 축하들에 나도 감사함을 전한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그리고 축하를 받으면 받을 수록 나는 왠지 모르게 겸허해진다. 지난 1년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들에게 생일 축하를 건넸나? 그 축하 속에 진심은 얼마나 담겨있었나? 형식적이지는 않았나? 나는 어떤 친구이고 가족이었으며 후배였나. 내가 건넨 축하의 무게를 생각하게 된다. 생일 선물은 기브엔 테이크라며 떠벌리고 다니던 내가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감사하고도 미안하며 부끄러워진다. 되도록이면 축하를 기브엔 테이크로 건네고 싶지 않다. 축하에 무게를 재고 싶지 않다.
축하를 건넨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고, 사랑받은 만큼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매번 말해왔지만 사실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 건지는 더더욱이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감사함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언제까지 생일이 설렐지, 이렇게 축하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짧고 긴 축하들을 모두 길게 기억하고 싶다. 생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축하하는 일과 축하 받는 일과 설레는 일과 부끄러운 일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 이 일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다음 생일에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