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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Feb 19. 2024

나쁜 일이 나쁜 일로만 남지 않도록,

 이런 건 처음이었어. 누군가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 글을 쓴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너를 만날 때마다 나의 글도 같이 휴가를 맞이하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려서 이번에는 반드시 글을 쓰겠노라 다짐하고는 나의 아이패드와 하하가 준 핑크색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겨갔지. 넓디넓은 너의 집 거실 한가운데 앉아서 탁상 위에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놓고 팔목 부분에는 수건을 덧대고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 너는 바로 뒤 소파에 누워서 귀에는 에어팟을 꽂고 유튜브를 봤잖아. 처음에는 그냥 소리를 틀어 놓고 보다가 나의 눈치를 보더니 방에 들어가 에어팟을 들고 오는 너를 보며 조금 귀엽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아. 글을 쓰다 조금 지쳐 뒤를 돌아보면 네가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어. 너를 자주 빤히 들여다봤다는 걸 너는 알까.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작게 왜? 힘들어? 하고 물어봐 주는 너. 그 물음이 좋아서 자꾸 너를 본 건지도 몰라.

  나는 원래 글이 잘 안 써지면 핸드폰을 보기도 하고 잠시 거실로 나가서 엄마아빠와 놀다가 들어오기도 해.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 고개만 돌리면 네가 있으니까.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주고,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하면 주물러 주는 네가 있으니까. 나는 너와 빨리 놀고 싶어서라도 오늘의 글을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 했어. 그래서 더 열심히 썼어. 다 쓰고 나니까 땀까지 나 있었어.


 "다 썼다!!!" 라고 외치며 기지개 한 번 크게 켜준 뒤에 아이패드를 끄고, 키보드 전원도 끈 뒤 다시 너와 놀 준비를 했어. 나는 너랑 놀 생각에 설레 있는데 너는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거야.

 "기다려봐! 그래도 글은 읽고 놀아야지!"라고 말하며 진지하게 글을 읽는 네가 조금 새삼스러웠어. 내가 방금 쓴 글을 누군가가 내 앞에서 바로 읽는다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글을 쓰고 올릴 때마다마다 누군가는 읽어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올리는데 그 누군가를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어. 글을 다 읽고 네가 제일 처음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 글을 쓰는 건 두세 시간 걸리는데 읽는 건 2분이면 끝이라고. 그게 조금 허무하다고. 사실 나는 글을 쓰면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 쓰다 보면 두세 시간은 금방 흘러가 버리니까. 그런 말은 글 쓰는 내내 나의 옆에 있었던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겠지. 글 쓰는 나를 바라보며 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궁금했을까? 아니면 글을 쓰는 내가 궁금했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어제는 나쁜 하루를 보냈어. 세상에 마냥 나쁘기만 하고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없다고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쁜 하루였어. 나쁜 말을 많이 들었고, 나도 나쁜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었고. 나는 그럴 때면 모든 게 무서워져. 글도 사랑도 내가 마음 쓰는 모든 일들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져. 그럴 때마다 나의 모든 분노와 두려움과 혼란을 그대로 느끼는 건 다름 아닌 너야. 너에게 모든 걸 다 뱉어내니까. 나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너를 보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 사랑이 좋은 것만 주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너의 기쁨은 물론 아픔에도 기꺼이 동참 하겠다고 다짐하는 게 사랑인 걸까?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나의 아픔도 감당하기 힘든 세상이잖아. 나만 돌보기도 벅찬데 내가 한 명 더 있다고 생각해 봐. 모든 아픔과 기쁨, 행복과 슬픔까지 같이 느낀다는 건 조금 피곤할 것 같아.

 

  너는 어떨까. 우리를 웃게도 하지만 울게도 하는 사랑을 너는 왜 계속하는지 궁금해.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 너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 글을 꼭 들려주고 싶어.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우리는 온통 뒤덮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 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지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사랑은 마음에 탄력을 준다. 심신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도 하고 돌아오게도 한다."


  슬아 작가님의 "심신단련"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이야. 나는 어제 이 글을 여러 번 읽었어.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했어. 마음이 다시 회복되는 걸 아주 천천히 느꼈어. 그리고 나쁜 일의 출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네가 자꾸 생각이 났어. 글을 쓰다 뒤돌아보면 있는 너. 나쁜 일의 끝자락에서 두 팔 벌려 나를 반겨주는 너. 나쁜 일이 나쁜 일로만 끝나지 않도록 애써주는 너를 생각하며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끝도 없이 일어나겠지. 우리는 그 앞에서 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거야. 글도 사랑도 다 싫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겠어. 그래도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결국 나쁜 일은 나쁜 일로만 남지 않을 거야. 네 옆에서 글을 쓸 날을 생각하며 나는 또 용기를 얻어. 다가오는 모든 나쁜 일 앞에서 우리 서로 용기가 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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