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모녀가 누워있다. 모의 이름은 민주이고 여의 이름은 진진이다. 민주는 거실 바닥에, 진진은 소파 위에 누워있다. 둘은 거실에 누워 시집을 본다. 이번 진진의 생일에는 여러 권의 시집을 선물 받았는데 제목은 이러하다.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당신은 첫눈입니까
식물원
진진은 평소에 읽고 싶었던 시집을 선물 받았다. 항상 궁금했으나 선뜻 사지는 못하는 책. 서점에 가면 가장 많이 들춰보지만 정작 집까지 들고 오는 일은 드문 책. 그래서 선물로 받았다. 특히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는다는 저 문장이 잊히지 않았다. '연인'들이 서로를 부지런히 잊는단다. 너무나도 정반대에 있는 말이지 않은가. 그리워할 연(戀) 자에 사람 인(人)자를 써서 몹시 그리워하는 사람을 뜻하는 연인이 서로를 잊는다는 건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는 거 아닐까. 몹시 그리워하는 사람을 부지런히 잊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 진진은 서점에 갈 때마다 저 시집을 들춰보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시집의 뒤표지를 본다. 그곳에는 시인의 이름과 간단한 정보가 표기되어 있다. 박서영. 199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2018년 2월 3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집은 박서영 시인의 유작인 것이다. 진진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박서영 시인의 출생일을 검색해 본다. 그리고 민주에게 묻는다. 엄마, 1968년생이면 몇 살일까? 으음 아빠보다 2살 더 많네! 근데 왜? 진진은 이 시집의 주인인 박서영 시인이 2018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민주에게 알린다. 그러고는 그 시집을 민주에게 건넨다. 민주는 시집을 이리저리 들춰보다 한 시에서 눈길이 멈춘다. '미행'이라는 시이다. 민주는 감탄하며 곧장 시의 한 부분을 진진에게 들려준다.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
피려고 여기까지 온 목련은 지고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 라니 너무 멋있지 않니? 우리 아파트에도 목련꽃 피잖아. 봄이 되면 큼지막하게 폈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떨어지는데 떨어진 목련 꽃잎 보면 가장자리가 누레져 있거든. 이 시에도 그렇게 나와 있네. 민주는 시에 대한 감탄과 함께 아파트에 피는 목련꽃에 관해 설명해 준다. 진진은 지금까지 아파트에 목련꽃이 피는 줄도, 아니 목련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목련꽃이 무엇인지 모르니 아마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진진은 목련꽃이 떨어진 뒤 꽃잎이 누렇게 변색된 모습까지 유심히 살펴본 민주가 신기하다. 엄마는 그런 것도 보냐고, 별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며 민주가 아파트 단지 내를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민주의 눈은 호기심과 생기로 가득하다. 그 눈으로 목련꽃도 보고,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도 본다. 그 속에서의 민주는 충만해 보인다.
민주는 진진에게 빨리 민주의 핸드폰을 들고 오라고 한다. 그 핸드폰으로 민주는 시의 한 구절을 찍는다. 그리고 카카오톡의 상태 메시지를 바꾼다. 원래 민주의 상태 메시지는 '바람 속에 햇빛 속에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였다. 이 구절도 어떤 시에서 들고 온 것이다. 이제는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이다. 카톡 프로필 수정 완료를 누른 뒤 또 한 번 감탄하며 진진에게 보여준다. 하~너무 멋있다! 이번에는 길이도 딱 맞아서 문장이 뒤로 안 넘어가! 아주 마음에 들어. 진진은 못 말린다는 듯이 민주를 바라본다. 그리고 너무 멋있다며 같이 맞장구를 친다. 민주가 목련꽃의 떨어진 꽃잎까지 볼 수 있었던 건 바람 속에 햇빛 속에 고요히 멈추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땅에 떨어진 것들은 멈추어야만 볼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사람은 목련꽃도, 목련꽃의 누렇게 변한 가장자리도 볼 수 없다.
두 모녀는 여전히 누워있다. 누워서 이 시집을 들었다가 저 시집을 들었다가 한다. 민주는 자기가 어렸을 때 시집은 삼천원 정도 했었다는 사실을 진진에게 알려준다. 진진은 시집이 삼천 원 했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살아온 민주의 삶을 생각한다. 민주와 진진 사이에는 시집이 삼천 원 이었다가 만원이 된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시간만큼의 세월이 민주에게 멈추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진은 모르는 시를 읽는 방법도, 좋은 구절을 보면 크게 감탄하는 방법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진진은 잠시 민주의 눈으로 시를 읽어본다. 봄이 오면 또다시 목련꽃이 필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도, 거리 곳곳에도 필 것이다. 이번 봄에는 목련꽃을 더 유심히 바라보기로 한다. 꽃잎이 떨어져 누렇게 변하는 모습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