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김연수 작가님의 단편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 편의 중반부를 넘어갔다. 점심을 먹고 느릿느릿 읽다가 잠이 들어버려 이편의 결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전 다시 책을 폈다. 좋은 책은 하루에 두번 이상 책을 펴게 만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엄격해진 병원의 보안을 겨우 뚫고 어머니를 만나러 병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그 엘리베이터 속에서 주인공의 회상이 시작된다. 삶의 운명에 대해, 불운과 불행의 차이점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앞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 혹은 회상이 전개되는 동안 거실에서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아빠는 아빠의 최애 프로그램 골때녀를 보는 중이다. 수요일 저녁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빠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주 크게 웃거나 아주 크게 탄식한다. 자기 딸이 방에서 문을 굳게 닫고 무엇을 하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딸이 방문을 닫은 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방 안의 딸은 엄마아빠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책을 읽는다.전화할 때도 있고, 핸드폰을 볼 때도 있으며 글을 쓸 때도 있지만 오늘은 책을 읽는다. 책 속에서는 꽤 진중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중이다. 책 속의 주인공은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주로 불운)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운이 우리를 지나가고 난 후의 삶에 대해서, 불운을 불행으로 만들지 않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딸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읽는다. 너무 좋은 이야기를 만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볼이 발그래 달아오른다. 소설 속 주인공은 불운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쳐 이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의 직장동료들과 그 동료들의 자녀들과 함께 나들이에 나가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 아이들끼리만 찍어보자고 하며 자신을 엄마의 품에서 때어놓은 기억. 그래서 사진을 찍는 내내 울었던 기억. 그러다 엄마 품으로 돌아가 울음을 그쳤던 기억. 이내 다시 안심했던 기억. 엄마와 관련된 기억들은 아주 사소하고 따듯하다. 이제 엄마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자녀 이야기로 넘어간다. 주인공이 엄마 품속의 아기였다가, 새로운 가정의 아빠가 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앞둔 어른이 되는 동안 거실에서는 여전히 골때리는 여자들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딸은 여전한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다시 소설에 집중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이인 열무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던 기억에 대해 말한다. 그 산책길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며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았는지를. 산책 내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열무에게 곰 인형 이야기를 겨우겨우 지어서 해주었던 것에 대해. 열무가 산책이 이어지는 동안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었던 것에 대해. 딸은 그 모든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조금 뭉클해진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의 결말을 읽어가고 있을 때쯤 거실에서 엄마의 환호성이 들린다. 딸은 바깥 상황이 너무 궁금해 소설을 잠시 덮고 거실로 나간다. 이번에는 웬일로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더 크게 환호한다. 엄마가 응원하는 선수가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 선수의 이름은 '카라인'. 네덜란드 사람이다. 엄마가 이 선수를 응원하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오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있는 카라인의 아버지가 한국까지 온 것이다. 그것도 카라인 모르게. 선수 대기실을 몰래 찾아온 아버지를 발견한 카라인은 깜짝 놀라며 아버지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안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자신이 카라인인 것처럼 눈물을 흘린다. 얼마나 좋겠냐면서.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겠냐면서. 이 카라인이 오늘 경기에서 마침내 골을 넣은 것이다. 자신을 보러 네덜란드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아버지 앞에서. 엄마는 그 광경을 보며 환호하는 동시에 또 눈물을 글썽인다. 저 아버지 얼마나 기쁘겠냐고, 딸이 얼마나 자랑스럽겠냐고 말한다.
카라인의 마음으로 울다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는 엄마를 바라보며 딸은 생각한다. 엄마는 누군가의 자녀인 동시에 누군가의 부모구나. 그건 어떤 마음일까. 딸은 자녀에서 부모가 된 엄마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 마음을 알고 싶어서라도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환호와 감탄과 불운과 힘듦이 있는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는 모르기에 다행인 것들이 많다.
딸은 오늘 이 소설의 결말을 봤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밖에서는 엄마아빠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기대어 딸은 아주 평온한 상태로 소설을 읽었다. 언젠가 이 소설의 내용은 엄마아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딸의 이야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딸이 부모가 되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날을 상상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방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거실을 지킬 것이고, 아이들은 거실의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꿈을 꾸며 커갈 것이다. 그렇게 감탄스러운 생들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