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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Mar 21. 2024

나는 쉽게 오지 않을 날에 잔뜩 기대를 걸어두고,

  요즘 '멜로가 체질'을 다시 본다. 이병헌 감독님의 특유의 말맛과 등장인물 간의 티키타카는 잊을 만하면 이 드라마를 다시 찾게 만든다. 주인공 진주, 은정, 한주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채로 30살을 맞이하는데 그중에서도 진주는 드라마 작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조작가. 유명한 작가 밑에서 보조작가로 일하던 진주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금은 억울하게 보조작가 자리에서 잘리게 된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슬픔과 절망에 빠진 주인공이 힘겨워하다가 다시 마음을 먹고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는 스토리가 전개되겠지만 멜로가 체질은 조금 다르다. 물론 진주도 슬퍼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조금 슬프고 많이 유쾌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그런데 아주 가까이서 보면 그것 또한 희극이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작은 독백, 생각까지 모두 듣고 있다 보면 비극보다는 희극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게 백수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진주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하는 드라마마다 대박이 나는 스타 감독 '손범수'가 공모전에 제출했던 진주의 각본을 보고는 꽂혀버린다. 그리고 진주를 쫓아다니며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멜로가 체질을 여러 번 돌려봤기에 이제는 대사도 외울 지경이지만 이 장면에 시선이 머문 건 처음이었다. 은정이 힘들다고 말하며 친구들에게 안아달라고 말하는 장면도 아니고, 범수와 진주가 싸우다가 진주가 먼저 용서하는 장면도 아니고 본격적인 드라마 서사가 시작되기 전, 진주가 범수에게 큰 기회를 제안받는 장면이 왜 좋았을까. 나는 요즘 너무나도 많은 제안을 건네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넘어가고, 브런치 작가가 된 지는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짧다면 한없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양의 글들이 쌓였다. 나는 내 글을 그 누구보다 좋아하기에 이제는 그 글을 종이책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써놓은 글도 있고, 시간도 있고, 모아둔 돈도 (아주 조금) 있으니, 이제는 책을 내기만 하면 된다. 요즘은 책 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하니 마음만 먹으면 책 한 권쯤이야 뚝딱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내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부러워진다. 종이 위에 쓰인 글이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 줄이야. 기왕 하는 거 기획출판으로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미리 알아본 출판사 몇 군데에 출간 기획서를 보냈고, 그들은 한 달이 넘도록 나에게 무응답으로 답했다. 조금만 명성을 얻어도 책을 내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내 책을 만들어줄 곳이 한 군데도 없단 말인가. 처음부터 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패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처음이든 나중이든 아리다.


   오늘은 꼭 한편의 글을 쓰리라 호기롭게 다짐하고 도착한 스타벅스에 앉아 내가 보낸 메일들의 수신을 확인한다. 역시나 모두 읽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낸 출간기획서와 원고를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무응답인 것이다. 잠시 절망한다.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 나는 왜 유명하지 않은가. 글을 쓰고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유명해지고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글을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책을 내겠다 마음먹은 것은 역시 욕심인가.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다 보면 한편의 글은 물론이고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럴 때는 최유리 노래를 떠올린다. 최유리 노래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랑하지만 요즘 들어 '살아간다'라는 노래를 즐겨 듣는다. 멜로디는 경쾌하고 가사는 마냥 경쾌하지만은 않다. 노래 가사 중에서도 '나는 쉽게 오지 않을 날에 잔뜩 기대를 걸어두고'라는 부분을 더욱 귀 기울여 듣는다. 쉽게 오지 않을 날에 잔뜩 기대를 거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위로가 된다. 원래 잔뜩 기대를 걸 만큼 좋은 날은 쉽게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시 절망에서 벗어나 한 줄의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된다.

 

  다시 멜로가 체질로 돌아와 주인공들이 야심한 밤에 거실에 누워 나누는 대화에 집중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진주가 한마디 한다.


"우리 일단 당장의 위기에 집중하자. 나 배고파. 라면 끓일까?"

 

  진주의 이 한마디에 친구들은 탄식하면서도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라면 세 개를 끓인다. 식은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앞으로 이들에게는 수많은 위기가 닥치겠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위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당장의 위기에 집중하는 일. 그것뿐이다. 내 글이 별로인지 아닌지, 책을 내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인지 아닌지는 글을 써야만 알 수 있다. 쓰다 보면 언젠가는 먼저 제안을 받는 날도 오지 않을까. 물론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잔뜩 기대를 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장의 위기에 집중하면서, 오늘은 오늘의 글을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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