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월하지 않는,

by 단어

옛날 옛적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작은 토끼는 엄마가 있었고 아빠가 있었습니다. 토끼가 토끼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4명은 가족이 되었습니다. 토끼 가족은 아주 평안했습니다. 엄마 토끼는 엄마의 역할을, 아빠 토끼는 아빠의 역할을, 토끼 자신과 동생도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토끼는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시험을 치고 자신의 점수와 등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낮지 않았습니다. 아니 꽤 높은 편이었습니다. 토끼는 그 사실이 좋았습니다. 시험을 잘 치고 등수가 높으면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았거든요. 엄마도 좋아하고 아빠도 좋아하고 선생님도 좋아했습니다. 특히나 주변 친구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제일 기뻤습니다.


그렇게 토끼는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언제나 높은 곳에 있는 토끼였습니다. 앞서가는 토끼였습니다. 앞서가는 것 말고는 토끼를 증명해 보일 길이 없었습니다. 상을 받고 반장을 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것만이 토끼를 빛나게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토끼의 기대만큼 등수가 나오지 않을 때면 작은 토끼는 속상했습니다. 자기보다 앞에 있는 토끼들이 부러웠습니다. 작은 토끼는 왜 큰 토끼가 될 수 없을까 상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작은 토끼보다 멋있는 토끼들이 많았거든요. 멋있는 토끼들이 많아질 때마다 작은 토끼는 괴로웠습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토끼는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자 세상에는 공부 말고도 작은 토끼를 멋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토끼는 다른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여전히 멋있는 게 좋았습니다. 앞서나가고 싶었습니다. 1등은 좋은 것. 빠르다는 건 앞서나간다는 것. 앞서나간다는 건 현명한 것.


아주 가끔 작은 토끼는 자기보다 뒤에 있는 토끼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과거의 자신처럼 자기를 부러워할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괴로워할지도 궁금했습니다. 그 토끼들을 생각하면 토끼는 쉽게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토끼는 자랑이 좋았습니다. 자랑만이 자신을 증명하는 길 같았습니다. 다른 토끼들이 몰라주는 멋짐은 진정한 멋짐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토끼도 많지만,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토끼들도 있다는 사실을 작은 토끼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토끼는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가끔만요.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하던 작은 토끼는 무늬 토끼를 만났습니다. 무늬 토끼는 가끔 달리는 토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달리기를 도와주는 앱에서 달리기를 멈추게 하는 문장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티브이 앞에서 누워있을 토끼들을 생각해 보세요."


작은 토끼는 저 문장이 왜? 하고 물었습니다. 누워있는 토끼들 사이에서 혼자 뛰는 일. 혼자 앞서나가는 일. 멋있는 일. 게으름과 졸음을 뒤로하고 달리기를 한다는 건 분명 멋있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무늬 토끼는 저 말을 들으면 달리기를 멈추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티브이 앞에 누워있는 토끼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고 했습니다. 왜 누워있을까.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마음은 어떨까. 그 토끼들에게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무늬 토끼는 달리기를 멈추고 그 토끼들 옆에 가서 같이 누워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누워있어 본 토끼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또 다른 헤엄 토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늬 토끼는 세상에서 제일 추월을 못 하는 토끼라고요. 작은 토끼는 생각했습니다. 추월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한가? 추월하지 않고도 멋있을 수 있나? 작은 토끼는 무늬 토끼가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무늬 토끼에 대해, 추월 뒤에 있는 토끼들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달려 나가는 것 보다 추월하지 않고 멈추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안담 작가님의 “친구의 표정” 중 ‘눈뜨기 연습’이라는 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글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친구의 표정 46p를 참고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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