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슬펐다는 건 아니고 정말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고 읽지도 않았다. 읽고 쓰는 대신에 듣고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제제와 함께. 제제와 근 2주 넘게 매일 전화를 했다. 우리가 매일 전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삶이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겨나기 때문이다.
전화의 명분이 슬픔이라고 해서 전화의 내용과 분위기까지 슬플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나는 제제에게 전화를 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몇 번의 신호음을 보내고 나면 제제는 마른 목소리로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는다. 하고 싶은 말과 토해내고 싶은 울음이 목 끝까지 차 있어도 일단 참는다. 그리고 서로의 하루에 관해 묻는다. 오늘의 하루는 어땠는지,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어떤 이슈는 없었는지 등등 흔한 일상을 나눈다.
제제는 주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그냥 누워만 있었어…! 누워서 넷플릭스 보고~ 밥 먹고~"
그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한다.
"완전 최고인 하루를 보냈잖아??"
그리고 나는 주로 나의 게으름을 고백한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포토샵 공부하려고 했는데 12시 넘어서 일어나 버렸어…. 그래서 그냥 허둥지둥하다 보니 밤이 됐어!"
그러면 제제도 답한다.
"무려 12시에 일어났다고?? 완전 멋있잖아!"
친구의 제1 덕목인 '돌아가며 스포트라이트 비춰주기'를 성실히 이행한 후 간단한 일상 보고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된다. 오늘 꾼 악몽부터 시작해서 직장 상사 욕, 해도 난리고 안 해도 난리인 연애, 혈육에 대한 불만…. 우리의 수다는 너무 뜨거워서 제제와 전화를 끊고 나면 항상 나의 양 볼은 발개져 있고 겨드랑이는 축축해져 있다...
이 전화가 시작된 이유는 제제가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을 수 없어서 우리는 일단 매일 전화한다. 너무너무너무 힘들다고 매일 말하다 보면 어느 날은 너무너무 힘든 날이 오고 또 어느 날은 너무 힘들었다가 언젠가 살만한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제제가 사는 게 좀 덜 힘들었으면 해서 내가 아는 좋은 말이란 좋은 말은 다 끌어와서 건넨다. 제제야 성장하는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은 필수인 거래. 고통 없는 성장은 없나 봐. 안 아프고 안 자라는 게 나은지 아프고 자라는 게 나은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는 성장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완전히 잘하고 있는 거야. 영원하고 끈질긴 사랑은 존재해. 지금 당장은 안 보이는 것 같아도 살다 보면 무조건 만나게 될 거야. 지금 좀 살기 싫어도 나는 제제가 살았으면 좋겠어. 일단 살아있어야 성장도 하고 사랑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슬픈 사람은 아름다워. 슬픈 사람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 그건 아무나 못 가지는 거야. 흉내 내지도 못하는 거야. 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름다운 것보단 그냥 사랑받고 싶어! 라고 하겠지만 이미 가진 아름다움을 어찌하겠니. 이 아름답고 슬픈 내 친구 제제야.
전화를 다 듣고 있던 동생은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말한다. 꼭 썸타는것 같다고. 둘은 서로를 끝없이 알아가고 있다고. 나는 푸하핫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한다. 나의 하루를 들려주고 속상했던 일도 기뻤던 일도 털어놓고 너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일. 웬만한 사랑이 아니고서야 일어나기 힘든 듣고 말하는 일이 우정에서는 일어난다. 우정에는 증(憎)도 없고 노(怒)도 없고 오직 애(愛)만이 있다. 우정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키우고 먹인다. 일단 살아라고. 일어나서 밥 먼저 먹고 그다음을 도모해 보자고. 혼자 먹기 싫으면 같이 먹자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이 안에서 점점 자란다. 슬픔은 걷어지고 기쁨이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 삶은 원래 고통이래~ 라고 말하면서. 그러면서도 기쁜 순간들을 끝없이 만들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