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왔다. 그런데 꼭 이런 날에는 손에 짐이 많다. 나는 체력이 안 좋고 그래서 외출할 때는 최대한 양 손이 가벼운 걸 좋아하는데 오늘은 실패했다. 비가 오는 탓에 우산을 들어야 하고 오른쪽 어깨에는 가방이 걸려있고 왼쪽 팔로는 애인이 준 매실청을 들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휴를 끝내고 돌아온 우리는 양손 가득 무언가를 바리바리 챙겨왔다. 애인은 나에게 줄 매실청 일 리터와 오미자청 오백 밀리, 나는 각종 비타민 세트. 자취생에게 무엇이든 없는것 보단 있는게 낫고 이상하게 필요 없는 것들도 자취한 후에는 무조건 챙기고 본다. 자취생은 항상 무언가 아쉬운 사람이다.
애인은 버스를 타기 직전까지 매실청을 들고 갈 수 있겠냐고 그러다가 종이 가방 터질 것 같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어차피 버스타면 금방이고 몇 걸음 걷지도 않는다며 호기롭게 버스를 탄다. 미리 손에 쥐고 있던 교통카드를 찍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앉자마자 교통카드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잊지 마, 카드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어. 왼쪽 아니고 오른쪽이야. 지갑에 안 넣었어. 이렇게까지 기억해 두는 이유는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서 급하게 내리다가 카드를 못 찾고 환승을 찍지 못하고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다…. 그렇게 내려서 여기저기 찾다 보면 꼭 주머니 깊은 곳에서 교통카드가 나온다.
이제 한숨 돌리고 노래 들으면서 멍때려야지 생각하고 에어팟을 찾는데 무언가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애인의 걱정대로 매실청을 담고 있던 종이 가방 밑부분이 찢어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매실청 무게를 거뜬히 견딜 튼튼한 재질이었는데, 비에 젖은 탓에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황스럽기보다는 웃기다. 종이 가방에 담겨있을 때는 몰랐는데 품에 안고 있으니 꽤 무겁고 큰 부피가 느껴진다. 찢어진 가방과 내동댕이쳐진 매실청을 찍어서 애인에게 보낸다. 이 사진을 본 애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인에게 종이 가방에 넣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 답장으로 온다. 진심으로 미안해해서 이것도 웃기다. 지금까지 살면서 다름 아닌 애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것 같다. 이상하게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고마운 일은 당연하게 느껴지고 미안한 일은 아주 미안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우린 자꾸 사과한다. 자주 못 봐서 미안해.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저녁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해. 종이 가방에 넣어줘서 미안해. 사랑은 주고 나서도 자꾸 미안해지는 일인가보다.
환승을 하기 위해 내린다. 내려서는 가로등 불 덕분에 선명하게 보이는 비를 구경한다. 아주 굵은 빗줄기가 아닌 이상 내리는 비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데, 가로등 불 밑으로 내리는 비는 아주 잘 보인다. 빛에 비치는 비가 예뻐서 사진으로 남겨둘까- 잠시 고민하다 그만둔다. 손에는 짐이 너무 많고 분명 언젠가 갤러리를 정리하다가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기에 그냥 눈으로 담아둔다.
한때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쫓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든 열심히 찍어댔다. 찍어서 열심히 SNS에 올렸다.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없을 때는 내가 가진 것, 받은 것을 자랑했다. 무엇이든 자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랑할 것이 없을 때는 나라도 보기 좋게 꾸며서 찍어 올렸다. 자랑해야만 정말 내 것이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행복은 행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랑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언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자랑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랑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때 나는 자랑하기 위해 살았다. 살다 보니 자랑할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랑하지 않으면 삶이 의미 없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자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진 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고 난 후일 것이다. 나에게만 향해 있던 시선을 옆으로, 위로, 아래로 옮기고 난 후일 것이다. 끝없는 슬픔은 사람을 바꾸지만 끝없는 사랑도 사람을 바꾼다. 끝없는 슬픔은 사람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고 끝없는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한다. 사람을 바꾸는 건 돈도 명예도 지식도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안다.
한쪽 손으로는 매실청을 안고 한쪽 손에는 우산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며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잊지 마, 카드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어. 오늘처럼 비가 와도 좋은 날이 있어. 가방이 찢어져도 괜찮아. 가방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든 것이야. 그 안에 든 것보다 중요한 건 그걸 주는 마음이야. 마음만으로도 우린 살 수 있어.
무엇보다 매실청는 맛있다. 물에 타서 먹으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매실주스를 먹기 위해서는 매실을 사서 껍질을 까고 설탕에 절이고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내 품에 들어오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야 한다. 하지만 매실주스는 맛있다.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나는 기다릴 수 있다. 매실주스가 맛있어지는 기간을. 나에게까지 오는 과정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맛있는 매실주스를 마실 수 있으니까.